사막의 달 외 4편 겨울호

-계간 문예지 현대시문학 2017 WINTER

by 니르바나

현대시문학 2017 겨울호 소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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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막의 달- 기청


너는 빈 허공에 떠서

깊은 바닥까지 비우고 비워내는

외로운 구도자(求道者)


이 저녁 붉게 물든 노을

서걱이는 모래 위

할키고 간 바람 흔적도

이제 너의 너른 품안에서

순한 아기가 된다


내 젊은 날 빛바랜 꿈들이

모여 있는 사막 한가운데 작은

오아시스의 환영(幻影),

그 열대의 그늘에 누워


이제 막 잠에서 깨어나 눈 부비며

꽃씨를 뿌린다

두터운 땅 낍질을 깨고나온 뿌리가

지구 반대편 어디쯤

꿈 많은 어느 눈먼이의 정원에

피보다 붉은 꽃을 피우랴


너는 텅 빈 허공에 떠서

사막과 사막의 거친 꿈까지도

잠재우는 외로운 구도자.


변하지 않는 것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 있을까

처음 그대로 밝음 그대로


연꽃 위, 구르는 물방울 맑음 그대로

물속 환히 비치는 투명함 그대로

잠든 어린아이 천진함 그대로

날선 칼끝에서도 참을 말하는 용기 그대로

먹구름을 모르는 청명함 그대로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 있을까

형성된 것은 변하고 괴로움이고

궁극이 아니라는

변하고 사위어서 마침내 사라지는

불변의 진리만 변하지 않을 뿐.


나는 없다


나는 없다

거울 속 낯선 얼굴처럼

나 아닌 나


나를 닮고 싶은 나를 위장한 나

나를 철저히 해체하고 싶은 나

너를 닮고 싶은 나

너의 가슴에 오래 묻히고 싶은 나

너의 가장 깊은 곳에서 너가 되고 싶은 나

거울 속 공허한 달처럼

만져지지 않는 가상의 나

나를 누르고 나를 던져버리는


그런 용감한 나는

어디에도 없다

거울 속 낯선 얼굴처럼

거울 속 공허한 달처럼.


까치야 너는


까치야 너는 곧게 자란 나무

맨 꼭대기에만 집을 짓는다

우러러 보아라

구멍이 숭숭 뚫린 하늘 궁전


세상 눈총 따가워서

까마득 높은 곳에 올라

세상을 아래로 깔고 산다

아니다

더 높아지는 연습을 하며

하늘 배꼽도 만지고


아 우리는 언제 이리

낮고 못난 구렁에서 헤어나

저 높은 곳으로


빛나는 곳으로

훤히 내려다보이는 곳으로

하늘 눈썹도 만지며

그렇게 높아질 수 있으랴.


신화, 그해 추석


유독 풍년 이었다

들판은 온통 금빛물결

텃밭 사과나무도 주렁주렁

갓 시집온 새색시

붉은 볼처럼

반짝반짝 빛이 났다


뒷골 돌배나무 가지가 축 늘어져

땅에 얼굴이 닿을 듯

비명소리에 놀란

배 골아 죽은 귀신들이

새벽부터 웅성거리는


그해 추석은 유독

객지로 나간 낯선 사람들이

연어가 돌아오듯

가쁜 파도를 헤치고

손에 꾸러미 하나씩 들고

유령처럼 모여들었다

유독 놀라운 것은


하얀 모시옷 차려입고

하얀 모자를 늘러 쓰고

하얀 병색의 얼굴을 한 노인이

처음으로 고향을 찾아왔다


젊은 날 새살림 차려 나간 뒤

고향 발길을 끊은 삼촌은

늦가을보다 훨씬 야위고 시린

황혼의 갈대가 되어 썰렁한

구름의 바람이 되어

혼자서 돌아왔다


그를 본 마지막

그해 추석은 유독

지워지지 않는 슬픔이 되어

살아 꿈틀대는 신화가 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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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청 시인 약력****


기청; 시인 문예비평가, 브런치 작가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으로 등단(1977)

이후 시 비평 칼럼 등 발표

논문; 이육사 시 연구-시간 공간 구조를 중심으로

온라인 소통 [시인과 문예통신] 운영

시집으로 <길 위의 잠><안개마을 입구>등 상재


▶이글은 필자의 문예지 발표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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