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전적 에세이2
모란이 만발한 안동 도산서원
서울은 그래도 살만한 구석이 있는 유배지다 수많은 얼굴들이, 수많은 꿈과 온갖
빛깔의 욕망이 뒤엉긴 낚시터 였다 사자탈을 쓴 이도 있고 늑대탈이나 순진한
양의 가면을 쓴 이도. 일부러 동해용왕의 아들인척 처용탈을 쓴 이도 있다 그런
연극같은 인생무대에서 잔짜 연극배우와의 만남이 현실로 다가왔다.
내가 배우 이길재와 만난 것은 상경하기 훨씬 이전의 일이다
당시 모노드라마 ‘햄릿‘ 지방공연을 온 이길재와 ’종파티’ 자리에서
나란히 앉아 얘기를 나누면서 시작되었다
동년배인지라 오래 사귄 친구처럼 서로 말이 통했고 열정이 부풀었다
그는 느닷없이 나의 희곡으로 공연을 하고 싶다는 제안을 했다.
마침 쓰고 있던 희곡을 모노드라마로 개작하여 서울 ‘공간사랑’에서
공연을 하게 되었다 연습을 하는 동안 주말이면 으레 상경해서 극단
‘배우극장‘팀과 어울려 시간을 보냈다
당시 극단대표인 김모 교수(나중에 모대학 예술대학장)와
연출을 맡은 이모 연출가(현 비중 있는 중진 연출가)와 작품 흐름에 대해
토론 하다가 의외의 충돌이 일어났다.
작품의도가 빗나가는 상황에서 공연시간은 임박하고 뭔가 결단을 내려야
했다 나는 공연포기 결정을 했다 주연배우 이길재는 난감한 상황에서
겨우 접점을 찾아 원래 의도대로 가고 연출가는 도중하차하기로 했다
참으로 어려운 결정 이었다 지금 생각해도 미안한 일이지만 후회는 안한다.
80년대초 어느 겨울, 서울 ‘공간사랑’ 소극장 앞에는 추위도 잊은 관람객들이 여러 겹 줄을
서고 극장은 뜨거운 열기로 달아올랐다
막이 내리면 관객 틈을 비집고 겨우 무대 위로 올라가 작가 인사를 할 때면
목이 메어 울먹거렸다.
그 뒤로 명동의 ‘카페 데아뜨로 추‘(연극배우 추송웅이 경영하던 국내 최초의
카페식 소극장)에서 공연을 하고 이어 대학로와 모 대학 초청공연 지방공연 등을 합해
어림잡아 천 여회 수년간 공연을 이어갔다 후속작품도 나의 희곡으로 올리면서
연극과의 만남, 배우 이길재 와의 인연은 그렇게 상당기간 지속 되었다.
지금 생각하면 순전히 객기로 뭉친 젊음의 열정, 예상하지 못한 길로의
파격 외도였다 지금도 연극하면 가슴이 뛰지만 누가 묻는다면 다시 그런
얼빠진(?) 외도를 하고 싶지 않다 그 길은 나의 길이 아니었기 때문.
배우 이길재는 나와 달랐다 천성 배우로 태어난 사람같았다 혼자 일인다역을 하면서
그는 신들린 무당같았다 공연기간동안 낮에 여러차레 공연을 하고도 지칠줄 몰랐다
밤이면 자유의 몸이 되어 그 자유를 만끽했다 술을 좋아하고 친구를 연극을
사랑했다 연극이 삶의 전부이고 삶은 연극 그 자체였다 그는 결국 원없이 배우로 떠들다가
무대를 벗어나지 못한채, 병마와 싸우다가 불꽃같은 생을 마감했다.
팽팽한 긴장의 연속, 거기에서 벗어나는 길은, 그 팽팽한 시윗즐을 내 스스로 끊는 길이 최선
이었다 신문사에 사직서를 던지고 나는 이왕이면 서울이 내려다보이는 남산동으로
거처를 옮겼다
그 많은 빌딩들, 그 대단한 재벌 고관대작들이 운집하는 광화문거리--남대문 명동을
한눈에 볼 수 있는, 내 기분에 따라 한눈으로 깔고 내려다보는 그런 남산이
마음에 들었다.
/“허생은 묵적골(墨積洞)에 살았다. 곧장 남산(南山) 밑에 닿으면, 우물 위에 오래된 은행나무가
서 있고, 은행나무를 향하여 사립문이 열렸는데, 두어 칸 초가는 비바람을 막지 못할 정도였다.
그러나 허생은 글읽기만 좋아하고, 그의 처가 남의 바느질품을 팔아서 입에 풀칠을 했다.” 중략
“허생은 거리에 서로 알 만한 사람이 없었다. 바로 운종가(雲從街)로 나가서 시중의 사람을
붙들고 물었다. "누가 서울 성중에서 제일 부자요?"
변씨(卞氏)를 말해 주는 이가 있어서, 허생이 곧 변씨의 집을 찾아갔다. 허생은 변씨를 대하여
길게 읍(揖)하고 말했다. "내가 집이 가난해서 무얼 좀 해 보려고 하니, 만 냥(兩)을 뀌어주시오./
-박지원의 <허생전>에서
조선후기 실학파 연암 박지원이 쓴 한문 풍자소설 <허생전>에 나오는 앞부분이다
당시 선비들의 무능과 허세를 풍자한 소설, 허생의 당당한 배포에 두말없이
돈 만냥을 꾸어준 변씨도 비범한 인물이다.
허생은 비록 무능한 선비로 살았지만 용감한 구석이 있었다 요즘 운종가(종로) 부잣집에 가서
돈 일억을 꿔달라면 어떻게 될까? 아마도 현대 인물로 보면 정주영 버금가는 배포와 통찰력을
지닌 기행(奇行)의 선비다 그런 허생이 살았던 남산골에 산다는 건 우연만 아닐 것이다.
육사가 가끔 찾아와 쉬다 간 퇴계종택 수졸당
육사의 외동딸 이옥비 여사
남산과의 인연은 운명처럼 다가왔다 남산 아래 살면서 소중한 인연을 만난것이다
우리는 자주 남산에 올랐다 도서관 주변에 서 있는 꼿꼿한 선비의 동상-
우리 순례코스에서 뺄 수 없는 곳, 퇴계 이황선생의 동상 앞에서 우리는 잠시 묵념을 한다
그러니까 아내의 선대 할아버지가 인자한 모습으로 내려다보는 그 곳은 우리들 성지인 셈이다
수년 전 모란이 필 무렵, 아내의 고향 안동을 거쳐 도산서원에 간적이 있다
우리가 도산서원에 들어서자 활짝 핀 모란이 반겨주었다 한 시대를 풍미하던 선비는
간데없고 자취만 남아 무언의 가르침을 던져준다.
나선 김에 ‘광야’ ‘청포도’의 시인, 이육사 기념관에도 들러기로 했다
육사는 진성 이씨 퇴계의 12대 손, 아내는 이육사 시인이 집안 친척이라 한다
나는 대학원에서 <이육사 시 연구>논문을 썼다 시인으로 독립운동가로 육사의 정신을
평소에 흠모해왔기 때문이다
지금 생각하면 이 또한 알 수 없는 인연의 수레가 이끌어준 것이라 여겨진다.
막 해가 기울고 간간이 떨어지던 빗방울이 멎자 오월의 신록, 상큼한 풀숲 내음이 밀려왔다
어둠이 깔리는 산등성이로 하얀 이팝꽃이 전설처럼 피어나고 그 날 이육사 시인이 혼자
고향길을 걷던 쓸쓸함이 몰려온다 어둔 산길, 한참을 걸어 육사가 자주 머물었다는
수졸당(守拙堂) 고택(퇴계 15대 종택)에서 하룻밤을 묵었다.
육사가 머물던, 바로 그 오래된 방에서 밤을 지새며 우리는 육사의 채취를 더듬었다.
다음날 고택 뒷산에 있는 퇴계묘소를 참배했다 다시 호젓한 길을 걸어서 몇 굽이를 돌아
육사 기념관에 도착했다 조영일 시인(관장)과 육사의 외동딸 이옥비 여사와의
만남은 소중한 시간이었다 그만큼 긴 여운을 남겼다.
한복을 곱게 차려입고 다소곳이 미소를 띠는 옥비 여사, 소탈한 모습이
여느 평범한 여인 그대로의 모습이지만 결코 평범하지
못했던 그의 굴곡의 인생여정이 주마등처럼 스쳐간다.
옥비 여사는 아주 어려서 아버지 육사와 헤어졌다
육사가 북경으로 압송되기 직전 동대문 경찰서 면회실에서의
짧은 회후가 영원한 이별이 된 것이다
불과 3살의 어린 딸 옥비는 어머니 등에 업혀 마지막으로 아버지란
이름을 불렀다 그리고 어린 옥비의 작은 손을 잡으며 짧은 한마디
인사를 남기고 간 후 그는 영 돌아오지 못했다.
연전에 나는 육사 탄신 100주년을 기념하여 뮤지컬 한 편을 썼다
뮤지컬 <광야에 서다>중 동대문경찰서에서 가족과의 이별장면이
나온다 바로 그 어린 옥비가 이제 노년의 할머니가 되어 이곳 아버지 육사
기념관에 함께 있다고 생각하니 감회가 남달랐다
언젠가 뮤지컬 <광야에 서다>가 공연되는 날 꼭 옥비 여사를
귀빈으로 초대할 생각이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