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도는 섬, 그들만의 유토피아

-시로 못다쓴 이야기-4

by 니르바나

시로 못다쓴 이야기/ 자전적 에세이 4


떠도는 섬, 그들만의 유토피아




인사동에 가끔 들러 전시회를 둘러보고 오는 날은 그래도

위로가 되었다 천상병 시인의 아내 목여사가 운영하는 찻집에 들러

차를 마신다 내가 가는 날 천상병 시인은 보이질 않는다 그는

어쩌다 이곳에 들러 막걸리 값이나 얻어가면 그만이란다.


오는 길에 운이 좋으면 인사동 거리에서 원광선사의 피리소리가 들린다

온갖 종류의 사람들이 모이는 인사동 거리에 왠 피리소리라니,

마치 귀신에 홀린 듯 귀를 의심해보지만 피리소리가 분명하다.


인사동 거리에서 피리 부는 괴짜승려


그는 출가승이지만 왠일인지 도시를 떠나지 못하고 인사동과 북한산을

오가며 사람냄새를 맡으며 산다 그는 봉슬의 대가로 새벽에 북한산에서

무술을 연마하고 낮에는 인사동으로 돌아온다 봉술은 지팡이를 이용해서

적을 제압하는 무술로 사찰에서 전해오는 전통무예라 한다

나도 얼마간 그들과 어울려 그의 문하생이 되기도 했다.


그는 괴짜승려인데 시문을 좋아하고 시집도 내었다 그는 나와 대화하기를

좋아하고 기분 좋은 날은 곡차도 마시면서 친구처럼 어울렸다

종로 피맛골 ‘시인통신’이란 주점이 아지트였다 같이 어울리는 맴버 중에는

꽤 유명세를 타는 승려화가와 서예가 문인 등 예술인들이 많아 다양한

화제로 서로의 예술적 체험을 나누었다.


그는 봉을 잡으면 눈빛이 매섭고 비호처럼 빠르다 하지만 평소에는

말이 적고 뭔가 우울해 보인다 승려로서 이루지 못한 성도(成道)의 열망이 점점

나약해져감을 스스로 견책함인가?

한 발은 승가에 한 발은 사바세간에 담고 어느 쪽도 속하지 못함을 괴로워함인가?


어느 날 새로 나온 내 시집을 전해주기 위해 인사동을 찾았지만 그는 종적을 감추었다

수소문해보니 지병이 도져 요양을 위해 산으로 갔다고 한다

그가 머무는 곳을 아는 이가 없었다 이후 인사동에 가면 거리가 텅 빈 듯 허전해진다

그의 유장한 피리소리는 혼탁한 세간을 잠시 맑은 물로 씻어내듯 정화시키는 그의 혼이

담겨있었다 지금도 인사동에 가면 문득 그의 피리소리가 그리워진다.


숱한 꿈의 교차로, 흐르는 유랑의 돛단배


그때 90년대 중반만 해도 서울 남산골에는 부엉이가 살았다 해가 지고 어둑한 겨울밤이 되면

남산 어디쯤에서 부엉부엉 구슬픈 소리가 들렸다 저 녀석이 내 심정을 어찌 알고 저러나?

어쩌면 내 고향 뒷산에서 울던 그놈이 아닐까?


소쩍새도 우정출연을 하듯 구색을 맞추었다 그러다 봄이 되면 장끼울음으로 바뀌고 진달래가

피를 토해냈다. 장충단 공원으로 이어지는 둘레길을 혼자 달리고 달렸다

달리다 지치면 아무데나 풀석 주저앉아 시내를 굽어보았다 저들은 어디서 왔나? 저들은 무엇을

먹고사나? 그리고 수없이 자문을 했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디로 가고 있나?

문득 원광선사의 파리한 입술이 둥둥 허공으로 떠올랐다 가늘게 떨리는, 기쁨도 슬픔도 아닌

묘한 미소가 내면 깊은 곳에서 나를 흔들었다.


내 유년(幼年)의 바다엔/ 섬 하나 둥둥 떠다녔다

비에 젖어 외로움에 떨던 날

섬은 내게로 다가와 미지의 꿈이 되었다

가자 춤추는 바다로 / 겹겹 파도로 둘러싼 사람들의 바다

떠도는 섬과 섬 사이 / 구비 돌아/ 인연에서 인연으로

마침내 깊이로 내면으로 가는/ 적막을 품은 섬 안의 섬,

아픈 나신(裸身)을 드러낸 채/ 떠도는/ 섬 안의 섬

떠내려가는 유랑의 돛단배 혹은 /

사무치는 그리움이여.


-필자의 시 <떠도는 섬>에서


낭만을 찾아 이니스프리 섬으로 떠나지도 못하고, 그 시절 우리는 겨우 지척의 남해안 어느 바닷가-

잿빛 눈발이 날리는 언덕에 비장한 심정으로 모였다

차이코프스키의 ‘비창‘이라도 울림직한 음산한 초겨울 어느 날, 우리는 말없이 소주잔을 비웠다

그리곤 거센 포말 일렁이는 검푸른 바다위로, 절필의 하얀 원고지가 산산이 흩뿌려지는 걸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숱한 꿈들이 모이고 흩어지는 교차로, 그 혼돈(混沌)의 지점에서 나는 어디로 흘러가고 있는가?

서울은 떠도는 섬, 저마다의 꿈 그들만의 유토피아, 쓰디쓴 좌절 허다한 좌초를

넘어 새로운 섬을 찾아가는 군상(群像)들, 나는 그 섬을 돌아 다시 아득한 안개 속에 숨은

섬 안의 섬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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