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문학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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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 [문학공간] 21. 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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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완전한 것이 있을까? 완벽한 사람이 있을까?
사람마다 나름대로의 크고 작은 콤플렉스(complex)를 가지고 산다. 이는 정신분석학의 개념으로 마음속의 서로 다른 힘의 존재를 뜻한다. 개인의 성장과정에서 형성된 감정의 복합이다.
그것은 죄책감 열등의식 자기비하 등의 심리 형태로 나타난다. 콤플렉스는 양면성을 가진다. 상승적(上昇的)으로 작용하면 극복의지로 승화되지만 반대의 경우는 좌절과 실의의 굴레가 되기도 한다. 빛으로 나아갈 것인가? 어둠으로 숨을 것인가? 선택은 결국 자신의 의지에 달려있는 것이다.
시인의 경우는 어떨까? 시는 자기성찰의 결과물이다. 시는 감성과 이성을 직조하여 새로운 세계를 창조한다. 때문에 시의 기반이 되는 것,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깊은 고민이 전제되어야 한다. 그래서 시인의 작품에 유독 자화상이란 주제가 많이 등장한다.
제목을 아예 명시적으로 ‘자화상‘이라 붙이기도 하지만, 의미맥락으로 자화상을 그린 경우도 있다. 대표적인 작품으로 미당 서정주 윤동주 이상의 시가 주목을 받는다. 윤동주의 자화상은 참회와 속죄양의식이 드러난다. 이상의 경우는 전도(顚倒)된 자의식이 주조(主調)를 이룬다. 이에 비해 서정주의 자화상은 어떤 또 다른 특성을 가지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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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전; 『화사집(花蛇集)』 1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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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약력 / 미당 서정주(1915-2000)
전북 고창 출생, 1935년 중앙불교전문학교 입학
1936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김동리 등과 ‘시인부락’ 동인 결성
첫 시집 <화사집>1941 출간, 예술원 회원, 현대시인협회 이사장
한국문인협회 회장, 불교문학가협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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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자화상>은 그의 첫 시집 <화사집>(1941) 맨 첫머리에 실려 있는 작품.
거기에다 시의 첫 구절은 “애비는 종이었다”로 시작한다. 충격적인 선언적 고백으로 포문을 여는 것이다. 이 시를 쓴 시기가 주석에 명기되어 있다. 소화 12년(1937)이면 미당의 나이 23세 때, 아직 불순(不純)에 물들지 않은, 피 끓는 열정의 연대임을 스스로 밝힌다.
그 다음 행에 “밤이 깊어도 오지 않았다”로 이어진다. 불길한 예감이다. 시적화자기 살았던 주권상실의 시대,
가족이 겪은 비운의 가족사, 확장되는 공동체의 고난을 암시해준다.
이 시로 인해 엉뚱한 논쟁을 불러오기도 했다. 누군가 미당의 선친을 천민계급 출신으로 곡해하는 해프닝을 빚기도 했다. 시를
문자로만 읽은 소치다.
여기서 ‘종’은 예속된 존재, 자주권을 상실한 자, 확장하면 ‘부끄러운 선대‘의 의미로 해석되어야 한다.
미당의 <자화상>이 발표되자 평론가 백철이 ‘특수계층의 후손’으로 오해하는 바람에 소설가 김동리가 반박을 하는 등 논쟁이 붙기도 했다.
실상은 미당의 동생과의 인터뷰에서 밝혀졌다. 고조부는 당상관과 통정대부를 지냈으며 선친은 14세 때 고창 무장현 백일장에서 장원을 하는 등 주변 고을에서 소문난 재사였다고 한다. 과거제가 폐지되자 서울로 유학 가서 측량기사가 되었고 나중에 군청 공무원이 되었다고. 시의 한 구절 때문에 빚어진 소동이지만 부침의 격동기를 산 선대의 고난이 선명하다.
시의 화자는 시인자신이기도 하고 타인이기도 하다 전자의 경우라도 완전 등식관계는 아니다. 시의 전체 맥락으로 파악해야한다.
이 작품의 경우, 시적 자이는 다층적 복합적 성격을 띠고 있다. 미당 개인의 자아라기보다 확장된 동시대의 공동체적 자아의 성격이 강하다. 오욕(汚辱)의 역사를 물려받은 후손으로서의 집단성 보편성을 지닌 것이다. 지금까지 시적자아를 단순히 ‘나’로 이해되던 관습은 제고되어야한다. 특히 현대시의 시적자아는 복합적이고 다양한 심충심리구조로 되어 있다. 이 경우 ‘다층적(복합적) 자아‘로 부르는 것이 더욱 현실적일 것이다.
2행 이후는 가족사의 내력을 상술한다. 가난과 외로움, 외조부의 죽음이 암시된다. 외조부와의 닮은 외모를 통해 혈연적 유전의 숙명을 드러내기도 한다.
“스물 세 해 동안 나를 키운 건 팔할(八割)이 바람이다.”
희망이 없는 암울한 식민지 현실에서의 방황과 정체성의 혼란이 드러난다. 이어지는 ‘죄인‘ ’천치‘는 좌절의 숙명이지만, 그럼에도 “나는 아무것도 뉘우치진 않을란다.”에서 당당한 의지적 태도를 드러낸다.
마지막 연에서 ’찬란히 틔어 오는 어느 아침‘은 상승적 의지를 구체적 이미지(밝음, 빛)로 암시한다. 하지만 ’시의 이슬‘(순수, 이상)과 ’몇 방울의 피‘(불순, 선대의 유산)의 극명한 대조는 교차되는 희망과 절망을, 결미부분의 “나는 왔다“의 과거형이지만 앞으로 전개될 고난과 영광의 미래까지 함축하고 있는 것이다.
미당의 <자화상>은 굴종을 거부한다. 어둠에서 빛을 지향하는 상승적 태도를 취한다.
‘영광’은 미당의 빛나는 시적 성공이지만 ‘고난’은 친일이라는 꼬리표 아닌가?
한 시대의 산 증인으로 시의 달인으로 키운 건 어쩌면 ‘팔 할이’ 그의 피할 수 없는 유산 때문 아닌가? 지독한 역설이다.
그 암울한 어둠에서 빛을 찾아 끊임없이 몸부림친 그의 생애, 빛나는 시업(詩業)은
한국문학사에 크나큰 빛으로 남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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