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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니르바나 Jul 07. 2021

이성을 잃은 세태, 제구실 못하는 언론

[이슈 에세이]


이성을 잃은 세태, 제구실 못하는 언론



요즘 세상이 중심을 잃었다. 이성을 잃었다. 좀 심한 표현으로 미쳐서 돌아간다.

‘배가 산으로 간다‘는 옛말이 되었다. 이제 들끓는 ’용광로 속으로 들어가는‘ 형국이다. 배가 거대한 풍파를 만나면 한쪽으로 쏠린다.

스스로 복원하려는 능력인 호메오스타시스( (Homeostasis))도 한계가 있다. 무게의 중심이 심하게 쏠리면 배는 결국 가라앉고 만다. 가라앉기 전에 정신을 차려야한다.

이성의 힘이 작동해야한다. 그런 역할은 누가 할 것인가?

그 사회의 원로, 지식인이거나 언론이 담당해야한다. 그런데 우리사회는 어떤가?

원로는 ‘꼰대‘로 낙인찍히고 지식인은 보신주의에 자신을 숨긴다. 언론은 저마다 신봉하는 이념의 대변자가 되어 목소리를 높인다. 어디에 기댈 것인가?


우리의 미래로 가는 배는 수난의 역사 그 자체다. 좌우 이념대립으로 정권이 바뀔 때 마다 이리 저리 쏠리고 기울어졌다. 

서로 편을 나뉘어 헐뜯고 상처를 입혔다.

그 결과 국력은 낭비되고 정신적 에너지는 고갈되어 사람의 품성마저 잃어버렸다.

그런 혼란 속에 이번엔 세대 간의 쏠림 현상이 불거졌다. “나는 국대다“ ”토론 배틀로 뽑겠다.“ ‘국대’니 ‘토론 배틀‘이니 하는 생경한 용어를 언제부터 언론이 ‘받아쓰기‘ 해왔는가?

‘국민의 힘 대변인’을 ‘국대’로 써야 신사고 인가? 토론 선발을 ‘토론 배틀’이란 국적불명의 살벌한 전투적 용어를 사용해야 ‘젊은이스런‘ 참신한 감각을 주는가?


말 그대로 ‘말싸움 잘하는 자‘를 대변인으로 선발하겠다는 것이다. 예부터 말만 익은 자들은 교언영색(巧言令色), 견강부회(牽强附會)에 능하지만 또 다른 화근을 만들어 논쟁의 도가니에 빠진다고 경고하였다, 지금 여권 대선후보 중 한사람이 말은 능숙하지만, 자신의 그 말의 함정에 빠져 허우대는 것을 목도하고 있지 않은가?

말의 이면에 숨어있는 인격이 말의 진정성을 높인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는 것이다


청년의 역습, 정치적 득실의 수단에서 위력의 부메랑으로

‘국대‘ ’토론 배틀‘ 국적불명의 용어 받아쓰기하는 언론

시류에 영합하기, 성급한 기대보다 언론 본분에 충실해야


30대 당대표에 20대 대변인, 이래야 혁신적 신사고(新思考)가 나올 것인가?

지금까지 기성정치인이 정쟁에 사로잡혀 정치를 오염시켰으니 청년들이 나서서 정치를 이끌어야한다? 이런 논리는 결국 기성인에 대한 불신으로 나타난 반작용(쏠림)현상에 다름 아니다. 이런 비정상적 오류를 바로 잡기보다 시류에 편성하는 일부 언론의 태도는 무책임을 넘어 사명을 의심할 정도다.


<<2030 세대들이 야당을 통해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자 여당도 청년층의 목소리를 담아낼 방안을 찾으려 부심하고 있다. 

젊은 세대가 정치에 관심을 가지는 차원을 넘어서 직접 정치에 참여해 사회와 나라를 바꾸고 미래까지 건설하길 바란다.>>


한 대표 보수언론지 <사설>의 마무리 부분을 인용한 것이다.

문맥적 의미만 보면 젊은 세대에게 정치적 결정권을 위임하는 듯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 물론 청년에게도 참정권은 법으로 보장돼 있다. 하지만 청년이라 해서 참신하고 유용한 정책이 나오리라는 기대는 성급한 것이다. 오히려 그 반대이거나 또 다른 문제를 야기할 가능성도 있다.


이 정권이 청년층을 정치적 득표의 수단으로 인식하는 시기가 있었다. 그래서 갖가지 청년층 맞춤정책을 쏟아내자 부작용이 따랐다. 일자리 창출을 위해 손쉬운 ‘세금 알바‘를 양산하자 청년에게 희망보다는 더 큰 절망을 안겨주었다. 

상대적 박탈감, 기성세대의 불신, 의존적 태도는 무엇보다 소중한 젊음의 가치들을 잠식시켰다.

이제 정치적 득실계산을 넘어 권력이 쏘아댄 화살이 부메랑으로 돌아온 것이다.


이제 오히려 권력의 정치적 입지가 흔들리는, 청년의 위력에 압도당하는 지경까지 왔다. 무능한 기성세대와 함께 무능 오만한 권력이 심판대에 오르는 역전현상(逆轉現狀)이 도래한 것이다.

우리가 사는 이 현상계는 의외로 단순한 구조로 돼 있다. 작용과 반작용의, 인과(因果)의 연속이자 대립이다.

그 너머 본질의 세계는 완전한 평등이며 분별 대립이 없다. 


이런 현상계의 지배원리에 순응하기 위해서는 극단의 쏠림을 피하는 길이 상책이다. 절대 선도 없지만 절대 악도 없다. 

상대적인 것이다. 서로 포용하고 반작용을 최소화하는 지혜가 필요한 것이다. 지금 우리 사회의 복원능력을 회복하려면 신사고도 중요하지만, 경험과 지혜, 상식의 회복이 급선무다. 소금과 저울의 역할을 할 언론의 사명이 무엇보다 중요한 시점이다.

(글-靑史, 시인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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