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 한옥마을, 시간의 뒤안길에서
[Travel Essay]
무차행(?)으로 만나는, 늦가을 서정(1)
-전주 한옥마을, 시간의 뒤안길에서
늦가을이 되면 마음이 텅 비는 느낌, 뭔가 알 수없는 아쉬움이 밀려온다
가을의 끝자락, 누군가 만나지 못한 아쉬움, 어딘가 가지 못한, 이루지 못한
혹은 어딘가에서 문득 만날지 모르는 나를 찾아서, 이리 구차한 속진(俗塵)을,
마치 새를 날려버리듯, 훌훌 그렇게 시원스런 놓아버림을 맛보기 위한
그런 설렘으로 떠나고 싶어진다.
무차행은 내가 지어낸 신조어다. 굳이 의미를 부여하자면 내차가 없으니
무차행(無車行)이요 순서 없이 발길 닫는 대로 가니 무차행(無次行)이라
불러도 무방하리라 좀 더 내 희미한 기억 속 인연의 실꾸리를 따라가면
무차회((無遮會)를 만날지 모른다.
무차회는 차별이 없는, 막을 것이 아무것도 없는 불교의 큰 법회를 뜻한다
무차회는 살아있는 중생을 보듬는 일, 삶에 지친 몸과 마음을 편안케 하는
법석이니 얼마나 크고 깊고 행복한 말인가?
오래전부터 전주에 가보고 싶었다 고즈넉한 한옥마을 어느 골목을 거닐며
잊혀진 조선의, 잃어버린 고향의 냄새를 더듬어보고 싶었다.
시간과 현실, 그 질긴 사슬을 벗어던지면 자유가 온다 그렇다 모처럼 기회를
붙잡아야 한다 우리(아내인 도반과 나)는 온양온천-조선의 임금들이 즐기던
핫 스프링에서 우선 몸과 마음을 풀기로 했다.
야간열차 타고, 저무는 군산항 어둑한 골목투어
어둑해질 무렵 군산행 야간열차를 타고 가급적 느릿하게 달리는 열차,
가끔 스치는 불빛을 가물가물 기억 속으로 흘리며--
군산의 밤은 밤바다 불빛에 졸고 있다 일제시대의 잔재가 남아있는
그 오만한, 완장을 찬 니혼진 순사의 호각소리도 들릴 듯, 어둑한 밤거리를
마치 도둑처럼 기웃거리며 골목투어를 했다.
일제 강점기 수탈의 본거지 군산항엔 일본인이 많이 살았다 당시 일본은행
건물과 일본식 주택이 즐비하게 모여 있는 거리, 이곳을 얼마 전 신흥 관광지로
개발했다고 한다 밤거리 옛 정취가 느껴지는 가로등이 줄지어 서 있다
더러 게스트 하우스로 개조해서 찾아오는 여행객을 기다리고 있었다.
언잰가 오래전 군산에 한번 온 적이 있지만 밤이라 그런지 왠지 낯설고 썰렁한
느낌, 늦가을이라 그런가?
그때는 바다가 보이는 공원 언덕엘 올라가 서해바다 노을을 보며 싯구를 흥얼거리기도 했지
하지만 오늘은 어디 따뜻한 잠자리부터 먼저 찾아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고풍스런 전주, 발 가는 대로 한옥마을을 걷다
말로만 듣던 전주에 도착, 택시기사에 물어 한옥마을부터 가보기로 했다
유서 깊은 풍남문이 있는 거리 가까운 곳 경기전 맞은편에 정동 성당이 있다
얼핏 보아 명동성당을 떠올리는 고풍스런 성당에 들어서니 오래된 시간의
흔적을 만난다 호남지역 최초의 서양식 근대건축물이라 한다
잎을 제법 떨구어 낸 늙은 감나무,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빨간 감이 조롱조롱
매달려 낯선 방문객을 내려다본다.
정동 성당 앞 널다란 길(태조로)을 따라 한옥마을이 펼쳐진다 마치 느린 조선시대
시간의 한 조각이 떠돌고 있는 착각에 빠진다 기와 담장을 따라 늘어선 은행나무
가 황금빛 송가(頌歌)를 뿌리며 방문객을 환영한다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청춘남녀가 풍경을 곱게 물들인다 왕관을 쓴 왕과 왕비도 스마트폰
카메라 앞에 포즈를 잡는다 멀리서 찾아온 낯선 이국의 손님들, ‘원더풀’을 연발하며
하나의 풍경으로 어우러진다.
우리는 그냥 천천히 걸으며 풍경을 흘리며 시간을 엿가락처럼 길게 늘어뜨려, 가슴으로 느끼고
마음으로 그렸다 자꾸 풍경 밖으로 밀려나는 아웃사이더 기질을 추스르며 가급적 하나의 풍경
속에 어우러지려 몸과 마음을 내버려 두기로 했다
여기저기 발 가는대로 눈 가는대로 기웃기웃 두리번거리며,
한옥마을 ‘고즈넉한’ 이란 말보다 ‘와글와글’이란 말이 더 어울리는 사람들의
장터, 흐르는 강물이다 어느 계곡을 흐르다가 개울이 되고 폭포가 되고 강이 되어
필경 바다로 간다 눈과 귀를 열어두고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가 교차되는
시간의 장외(場外)지역, 시공을 넘나드는 치외법권을 누리며 어슬렁거리는,
꿈같은 도리천(忉利天) 어느 복사꽃 만발한 계곡을 거닐며 노닐다.
전주 한옥마을은 풍남동 일대 650여 채의 한옥이 군락을 이루고 있는 전통마을.
넓게 펼쳐진 공간에 한옥 생활체험관 전통문화센터 공예품전시관 전통 한지원
전퉁 찻집 등이 있다
조선의 마지막 황손 이석 선생이 거처하는 집, 아담한 한옥의 승광재(承光齋),
대문은 열려있지만 내무수리로 들러볼 수 없어 잠시 눈으로나마 더듬어본다
역사의 굴곡만큼이나 떠돌이로 살아온 비운의 인물, 그 황량하고 적막한 영혼이
노후라도 평온하기를, 흐릿한 수채화로 그려본다,
단지 내에 갖가지 먹거리 가게와 한옥체험 게스트하우스, 식당이 즐비해 장삿속이란
비판도 있다 이런 상업시설은 한옥단지와 분리해 재정비할 수 없을까?
만약 그럴 수 있다면 한옥마을 고유의 ‘고즈넉’을 되찾게 되리라
전통의 보존이란 측면과 주민사생활의 보장이란 요구의 충돌을 최소화하는
지혜가 필요해 보인다.
시작한 길을 되돌아 나오니 경기전 정문이 눈에 들어온다 마치 궁궐을 닮은
느낌, 역사의 시간이 조용히 흐르고 있는, 흐른다기보다 조용히 고여 있는 그런
푸른 물빛의 호수처럼 고즈넉하다.
노란 으능잎 지는 늦가을, 고궁 뜨락을 거닐며
문득 초정 김상옥 시인의 ‘으능잎‘을 읊조려본다
<벌써 가을이 진다/ 고궁은 가을이 진다//
노오란 소낙비로/ 으능잎 가을이 진다
바람도 조각난 가을/ 우수수 가을이 진다>
바로 여기, 눈앞의 이 풍경을 그대로 읊은 듯, 무릎을 치게 한다
‘은행잎‘보다 방언인 ’으능잎’이 더 정감어린 향수를 불러온다
‘노란‘ 보다 ‘노오란‘이 더 애틋한 안타까움을, 거기다 소낙비와 결합해서
더 진한 색채감으로 일시에 흩날리는 감흥을, 농축된 시어로 그려낸다
절묘한 언어의 조탁(彫琢)이란 말밖에 더 꺼낼 수가 없는 완성의 경지,
전율을 느끼게 한다.
우리는 역사 앞에 무엇인가? 그저 먹기 위해 일하고
개미 체바퀴 돌 듯 시간을 갉아 먹고 그 대가로 얼마간의 자유를, 값싼 낭만과
고뇌를 오가며 텅 빈 공백을 메워가는, 그런 덧없음이 아닌가?
전라도에 왠 경기전? 경기전은 조선 건국의 발상지를 기념하기 위한 전각이다
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세우고 난후 이를 기념하기 위해 지은 것으로 ‘왕조가 일어난 경사스런
터’란 뜻이 담겨있다
전주의 자존심 조선의 자존심을 상징하는 건물이다. 정문을 들어서면 널다란 마당, 궁궐을 닮은
정전과 전주사고(조선왕조실록 전시) 조경묘, 예종의 태실을 볼 수 있다.
가까운 곳에 전북예술회관이 있었다 마침 세계서예 전북비엔날레가 열리고
있어 발길을 끌었다 전시행사는 여려 개 파트로 나누어 다양한 서예의 면모를
느끼게 해준다
명사서예전, 생활서예전, 전북 우수활동작가 서예전, 등 서예의 품격과 기량을 가늠케 한다 특히
양생서예전은 서예의 힘 기 도 예를 응용한, 건강을 위한 명구를 전시하여 눈길을 끈다.
서예에 관심이 많은 아내는 작품 앞에 서서 시간 가는 줄 모른다 어스름 달빛 아래 필마가 내달리듯,
단숨에 내려쓴 일필휘지의 묵향(墨香)은 숨을 멎게 한다
그 기량과 품격은 감동을 넘어 사람의 마음을 적신다 예향 전주의 자부심과, 지역을 넘어 한국서예의
멋과 선비정신을 세계에 펼치는 야심찬 기획으로 마침 한옥마을을 찾은 우리에게도
행운의 기회가 된 셈이다.
전주 이름난 먹거리 중에서 전주막걸리는 독특한 문화를 이루고 있다해서 유명하다
저녁시간에 그 특유의 분위기를 맛보고 싶었지만 참기로 했다
새벽에 마이산에 오를 계획 때문이다 아직 세상이 깨어나기 전, 신선한 마이산의
청정한 기운을 느껴보고 싶었다
그래서 해가 떨어지기 전에 서둘러 진안행 버스를 타기위해 터미널로 향했다.
글-청사(기청 시인 문예비평가)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