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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니르바나 Apr 11. 2023

사월의 노래, 인공지능예술의 한계


시인과 문예통신] 23. 4. 11(화)


////////////////////////// 이 계절의 시 /////////////




사월의 노래


/박목월



목련꽃 그늘 아래서 베르테르의 편질 읽노라

구름꽃 피는 언덕에서 피리를 부노라

아 아 멀리 떠나와 이름 없는 항구에서 배를 타노라

돌아온 사월은 생명의 등불을 밝혀든다

빛나는 꿈의 계절아

눈물어린 무지개 계절아


목련꽃 그늘 아래서 긴 사연의 편질 쓰노라

클로바 피는 언덕에서 휘파람 부노라

아아 멀리 떠나와 깊은 산골 나무아래서 별을 보노라

돌아온 사월은 생명의 등불을 밝혀든다

빛나는 꿈의 계절아

눈물어린 무지개 계절아


*출전; 박목월 시전집, 민음사,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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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친구에게


오랜만에 너의 얼굴을 떠올려보노라. 이 계절이면 너를 생각한다.

네가 이 노래를 자주 불러 아직 귓가에 쟁쟁하거든,

그리고 몇 해가 흘렀을까? 40대 한창 꿈을 실현해야할 바쁜 나이에 훌쩍 떠나고 말았으니, 참 야속도 하지, 그러면서 오래 이 세상에 머물 것처럼 온갖 꿈을 꾸기만 했지, 이제 그 꿈들이 어느 하늘 별이 되어 수도 없이 반짝이고 있는지 몰라,

아니면 이 노래 슬픈 곡조에 실려 ‘

목련꽃 그늘 아래서-’ 혹은 ‘구름꽃 피는 언덕에서-‘ 하염없이 그렇게 하염없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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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계간 시원 23. 봄호 표지 통권 27호

                                          (발행겸 편집인; 김송배 편집국장 강명숙)

                                          


계간시원 [권두 칼럼] 원고-------------------------------



인공지능(AI) 예술의 한계

-기청 (시인 문예비평가)            



사람이 허수아비가 되는 시대가 도래 했다. 인공지능 시인 작가 화가 작곡가가 만든 작품을 인간이 감상하는 시대가 되었다. 이건 우려가 아니라 현재진행형이다. 그동안 알고리즘이 광속도로 발전하고 있다는 뉴스를 보아오긴 했다. 하지만 이렇게 빨리 점령군처럼 인간을 대체하려 나설 줄은 물랐다.


최근 인공지능 ‘시아(SIA)’가 시를 쓰고 그걸로 시집을 냈다고 한다. 그뿐 아니다. 그 작품을 바탕으로 ‘파포스’란 시극을 무대에 올릴 예정이다. 그게 다가 아니다. 무용수가 그 시를 주제로 춤을 춘다니 이거, 사람 체면은 뭐가 되나? 그냥 구경이나 하는 허수아비가 아니고 무엇인가?



인공지능 예술의 현주소


문학 장르 만해도 소설 희곡 수필 등으로 확장되고 있다. 뿐만 아니라 그림 음악 등 예술 전반을 인공이란 알고리즘, 허구의 합성물이 넘쳐나는 시대가 되고 있는 것이다. 지금까지 예술은 인


간만이 감당할 수 있는 창작물이란 자부심을 가져왔다. 예술이란 인간의 섬세한 감정 정서를 다루는 분야라 감히 기계 따위가 넘보는 걸 미처 상상도 못했다. 하지만 엄연한 현실이 되었다.


<밤은/ 나를 취하게 한다//

하나하나/ 소리를 따라

취하면/ 어느덧

나는 밤의 한가운데 와 있다.//

밤은/ 나의 날개이며/ 몸이다.>


<이 시집의 해설에 시아가 쓴 시에 대해서 시인들의 반응을 적어놓았습니다. '단정함. 시를 이제 시작하려는 것 같음. 군더더기가 없음. 잘 읽힘. 시를 사전처럼 정의 내리려 함, 지시대명사 등 산문적 어휘를 자주 사용. 오글거림 없음. 처음 쓴 단어를 계속 쓰고 있음. 반복적인데 리듬감이 느껴지지 않음…>



카카오브레인이 개발한 인공지능(AI) 모델 ‘시아’의 첫 번째 시집, <시를 쓰는 이유>가 출판되어 문제의 화두를 던졌다.

위의 인용 시는 인공지능 ‘시아’가 쓴 <밤중의 밤>이란 시, 뒤의 인용문은 시인들의 반응이란다. 물론 ‘시아‘의 작품이란 걸 모른 상태에서다. 얼핏 보아도 엉성해 보이는 문학 지망생의 작품쯤으로 보인다.

여기에서 우선 시의 화자인 ‘나’에 주목한다. 진술의 주체인 ‘나’의 감수성이 얼마나 창의적 개성적인가, 얼마나 독창적 미적으로 승화시키는가의 문제다.


엄밀하게 말해서 인공지능이 쓴 시의 화자는 기계이고 알고리즘이다. 학습된 알고리즘이 사람 흉내를 낼 뿐이다. 문제의 ‘시아’도 근현대시 1만3천 여 편을 학습한 알고리즘일 뿐이다. 그런데 이를 예술창작의 주체로 인정할 것인가?



기술이냐 예술이냐


<인공지능은 예술작품 창작에서 훌륭한 역할을 할 수 있다. 하지만 창작 ‘주체’로서가 아니라 ‘도구’로서 그러하다. 예술 창작은 작품을 결과물로 만들어내지만, 뭔가를 만들어내는 그 작업은 ‘공학’이 아니라 ‘미학’의 문제이다. ‘인공지능 예술작품’의 문제는 그 누구도 ‘순수 공학’의 문제로 생각하지 않는다. 이것이 인공지능의 작품 창작과 관련해 사람들이 계속 의문을 품는 이유다.>

-미디어 기사 인용


위의 인용문이 시사하는 바처럼 인공지능은 창작의 주체가 아니라 도구일 뿐이라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있다. 공학은 차디찬 공식의 논리에 의존하지만 미학은 감정 정서에 의존하는 예술의 시작점이자 결과물이다.


예술작품의 창작과정을 보아도 인간 창작가와 인공지능의 차이가 분명히 드러난다.

전자의 경우 자신의 생생한 경험을 토대로 하지만 후자는 입력된 자료를 토대로 할 뿐이다. 작품을 발표하기 전에 퇴고라는 자체평가의 과정을 거친다. 후자는 미리 주어진 데이터를 통해 순식간에 생산한 합성물을 무작위로 내어놓는다. 원리상 평가기준을 내장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결과는 뻔하지 않은가. 인공지능의 경우 인간의 감정을 흉내내는 합성물에 다름 아닌 것이다. 가장 우려되는 것은 인간이 기술의 합성품에 감정을 내맡기는 일이다.


일찍이 플라톤은 시인 추방론을 주장했다. 하필이면, 왜 죄 없고 만만한 시인을 쫓아내려한 것인가? 그 이면에는 본질의 진리를 옹호하는 숭고한 정신이 담겨있다. 시인은 자연을 모방하고 화가의 작품을 모방하여 진리에서 여러단계 멀어져 있기 때문이라 역설한다. 이런 논리대로라면 인공지능 예술은 인간의 그것을 다시 모방하여 허구의 허구에 불과한 모작(模作) 내지 합성물을 생산하는 꼴이 된다.


사회적 합의와 윤리정립이 먼저


아직 모순과 현실 사이 논쟁이 뜨거운 시점이다. 인공지능 예술이 기술이냐 예술이냐 다투고 있다. 예술로 인정한다면 저작권은 알고리즘 개발회사냐 검색으로 뽑아낸 사용자냐의 문제도 정립되지 않았다. 인공지능 학습자료로 사용되는 방대한 창작물의 저작권 침해문제도 검증이 요구된다. 또한 단순 검색한 합성물을 출판하여 상업적 이득을 취하는 것이 타당한 가, 이런 행위로 인한 인간정서의 훼손에 대한 윤리의 문제도 남았다.


이런 마당에 정부와 문화예술기관에서는 발 빠른 행보를 보이고 있다. 경기연구원은 ‘인공지능과 함께하는 예술’이란 보고서를 내고 경쟁이 아닌 공존시대 준비, 인공지능 저작물의 저작권 인정, 문화예술 콘텐츠의 지원책 등을 제안했다. 예술가와 관련 전문가(개발자 학계 미디어 등)가 참여하는 토론회, 일반 사용자 참여 공청회 등을 제대로 거치지않았다면 지금이라도 바로 잡아야 한다.


한 술 더 떠는 곳도 있다. ‘시아’를 작가로 한 인공지능 시극 ‘파포스’는 한국문화예술위원회 2022년 예술과 기술융합지원사업에 연속지원을 받아 대학로에서 공연을 준비 중이라 한다.

고민하는 인간예술가의 지원도 아득한데, 주체가 없는 기술을 예술로 대접해야 하나? 아직 기준이나 윤리도 정립되지 않은 한갓 알고리즘의 합성작에 너무 성급한 기대를 걸고 있는 건 아닌지 사려 깊은 성찰이 필요한 시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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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예 신간///


저자가 말하다_『문학의 깊이와 철학』

박유정 지음 | 인간사랑 | 300쪽


바슐라르를 오마주 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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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과 철학의 해석학적 만남/

영혼의 깊이와 그 실존적 지평


카뮈의 『이방인』에는 어머니의 부고를 받고 불경하게 행동하다가 바닷가에서 햇빛이 따갑다는 이유로 아랍인을 살해하는 주인공이 나온다. 이야기는 그야말로 부조리하지만, 소설은 일관되게 주인공이 어머니에게 잘못했기 때문에 기소되어 재판을 받는다는 인상을 강하게 준다. 즉 어머니의 이미지가 소설 전체를 압도해서 소설의 서사적 부조리성이 곧 어머니의 이미지에 바쳐지는 것처럼 느껴진다. 이는 카뮈가 술회했듯이 그의 마음을 최초로 열게 했던 이미지가 어머니라는 영상(映像)이고, 그 영상은 곧 대답 없는 존재의 부조리를 가리키며, 따라서 카뮈의 부조리 문학은 어머니의 이미지에 바쳐진 상상력의 산물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바슐라르의 문학 철학 속에서 카뮈를 ‘물의 작가’로 분류할 수 있는 이유이다.


이렇게 작품의 몽상을 분석함으로써 그것이 기반한 무의식을 발견해 내는 비평론이 바로 바슐라르의 문학 철학인데, 이 책은 이러한 그의 문학 철학의 길을 꿈꾸며 신비평과 해석학을 통해 또 하나의 문학 철학의 길을 가고자 했다. 즉 신비평에서 말하는 작품 속에 있는 ‘깊은 나’(Moiau fond)와 그것을 드러내는 지평이 곧 실존적 지평이라고 해석함으로써 문학이 곧 철학이 되는 해석학적 탐구를 시도한 것이다. 다시 말해서 문학과 철학은 서로 다른 학문성을 갖지만, 문학이 깊어져 그것이 단순한 이야기가 아니라 인간 실존의 지평을 노정할 때 그러한 실존적 지평으로서의 영혼의 깊이는 곧 모든 인간이 그 앞에 서는 보편적 지평으로서 문학과 철학이 만나는 지점이라고 해석한 것이다.


철학자 바슐라르(1884∼1962)는 프랑스의 과학철학자이지 문학비평가로서 과학부터 시와 교육, 시간에 관한 철학을 연구했다.

이 책은 이러한 문학 철학, 즉 영혼의 깊이로서의 실존적 지평을 통해 문학과 철학의 해석학적 만남을 꾀한다. 우선 고전명작이 왜 우리에게 책 읽기의 괴로움을 주는지를 설명하면서 시작한다. 고전 명작이 누구나 아는 책이지만 아무도 읽지 않는 책이 되곤 하는 것은, 그것이 종종 책 읽기의 괴로움을 주기 때문이다.


이는 고전 명작이 일상적 경험이나 교육 혹은 상식을 통해 이해되지 않는 실존적 투쟁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일상성의 일차원을 넘어서는 문학의 깊이에서 문학의 본질적 가치가 있음을 경험과 체험의 해석학적 개념을 통해 설명하고, 그리고서 시·소설·수필·시나리오에서 그러한 깊이를 담고 있는 작품들을 고찰하는 것이 이 책의 2부의 내용이다.


박유정/ 대구가톨릭대 프란치스코 칼리지교수·철학

공유의 가치- 출처; 교수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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