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에게나 자신만의 공간, 자신만의 시간이 필요하다. 지친 마음을 스스로 위로하기 위해 찾게 되는 공간, 때로는 타인의 모습을 무심히 바라보며 잠시 쉬어갈 수 있는 공간이. 그럴 때면 나는 광화문을 찾는다. 나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사랑하는 곳. 굳이 대한민국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가 공존하고 있는 곳 혹은 문화예술의 요충지라는 장황한 설명 없이도 광화문은 그 이름 자체만으로 장소가 가진 특유의 고즈넉한 분위기를 떠올리게 한다.
광화문, 그 애정의 시작
중학교를 졸업할 무렵, 지방에서 서울로 이사 온 후 가장 먼저 찾았던 곳이 바로 광화문이었다. 서울에 막 올라온 어린 아이에게 서울에서 광화문 이외의 다른 장소에 대한 정보는 부족한 편이었고, 무엇보다 광화문에서 내 눈으로 직접 이순신 장군의 동상을 보고 싶었던 것 같다. 서울의 중심이 되는 거리 한복판을 지키고 서 있는 동상이라니. 오랜 시간 묵묵히 그 자리를 지켜오는 것이 주는 아름다운 무게감은 사춘기였던 나에게 매우 매력적으로 다가왔었다.
이순신 동상을 눈앞에서 마주하며 생각했다. 변하지 않는다는 것은 강하다는 것을 의미할지도 모른다고. 그렇게 나의 첫 ‘로망’과도 같았던 존재와의 조우가 이뤄진 이후 발걸음은 자연스레 대형 서점으로 향했다.
어머니의 말씀에 의하면 나는 지금은 기억나지 않는 유년 시절부터 책을 많이 읽었다고 한다. 사실 책의 내용보다는 책의 질감 혹은 냄새에 반응했던 것이겠지만. 아무튼 책을 가까이 하는 나를 보면서 부모님은 여느 부모가 그러하듯 집안에 신동이 태어났다며 자랑스러워했다고 한다.
하지만 또 여느 아기가 그렇듯이 자라면서 지극히 평범한 아이가 된 내 옆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항상 책이 있었다. 책을 펴면 다른 세계로 떠날 수 있는 또 하나의 문이 열리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 생각은 그때보다 내 머리가 한 뼘 더 자란 이후에도 여전히 유효했으며, 언제나 시골의 작은 도서관 혹은 동네 서점만 들락날락했던 내 앞에 대형서점 속 끝없이 펼쳐진 공간의 책들은 아직까지도 아찔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나에게 남은 마지막 감성, 스폰지 하우스
그리고 광화문 6번 출구에서 가까운 스폰지 하우스, 일명 ‘광폰지’라고 불리는 영화관은 대형 서점 다음으로 내가 가장 사랑했던 공간이다. 대학에 갓 입학한 신입생 시절 영화 동아리에 가입한 후 친구와 함께 찾았던 스무 살의 여름부터 줄곧 나에게 남아 있는 마지막 감성을 확인하고 싶을 때면 찾았던 나의 아지트. 도심의 한복판에 있는 작은 골목길로 들어가면 그 끝에 위치한 영화관이었다.
신기하게도 영화관 주변에서는 도심의 소음이 희미하게 들렸었다. 집중해서 책을 읽을 때 느껴지는 세상과의 단절을 그 곳에서도 느낄 수 있었다. 그 엷은 고독이 좋아서 나는 언제나 홀로 그 곳을 찾곤 했다. 하지만 혼자 영화를 보고, 책을 읽고, 커피를 마시고, 전시회나 공연을 보면서도 외롭지 않았다. 어쩌면 나는 혼자 있기 위해 그 곳을 찾았는지도 모른다. 이를테면 광화문에서 나는, 혼자여서 누릴 수 있는 행복에 대해 알게 된 것이다.
때로 사람은 혼자 있을 때 더욱 타인에게 관심을 갖게 되기도 한다. 카페에서 몇 시간이고 앉아서 사람들을 구경하고 있으면 복잡했던 머릿속은 어느 틈엔가 조용히 정리된다. 어떠한 공간과 시간의 제약 없이 바라보는 사람들의 얼굴은 저마다 다른 빛을 띠고 있다. 무심히 지나가는 사람들의 얼굴, 발걸음에서 나는 그들의 삶을 읽는다. 저마다의 인생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단 한 권의 책과 같다.
그리고 그 책의 내용은 무수한 선택과 결정적 ‘순간’에 의해서 완성된다. 그래서 나는 타인의 움직임 속에서 그들의 삶을 상상한다. 실제 그들의 삶이 어떤 형태로 이루어졌는지 알 수 없지만, 그 ‘순간’을 통해서 그들의 삶을 포착해보는 것이다.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가 있는 곳
가끔은 광화문을 걸었을 과거의 사람들을 떠올려 보기도 한다. 경복궁과 덕수궁 등 광화문에는 우리나라의 아름다운 고궁이 있다. 경복궁과 덕수궁은 서울이나 수도권에 사는 학생들에게는 종종 졸업앨범의 배경이 되었던 장소로 기억되기도 한다. 어떤 사람들은 덕수궁 돌담길에서 연인과 나란히 걷던 추억을 떠올릴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런 개인적인 기억 외에도 고궁, 그리고 그 고궁들을 잇는 광화문에는 우리나라의 과거가 새겨져 있다.
현재를 나타내는 정부청사와 자신이 살아가고 있는 시대에 대한 외침을 이어가는 사람들의 소리도 끊임없이 들려온다. 그리고 미래를 기약하는 수많은 기업들과 미디어 그룹이 존재한다. 그리고 이렇듯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가 공전하는 도시의 길을 따라 유유히 흐르는 청계천이 있다.
흐르는 물처럼 시간은 멈추지 않고 지나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멈추지 않는 시간 속에서 여전히 그 자리에 남겨진 것들이 주는 감동은 문득 문득 그 곳을 잊지 않고 찾게 되는 이유가 된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남겨진 것’에 대한 연가. 광화문이 주는 그 쓸쓸하지만 아름다운 ‘순간’은 우리의 삶 속에 조금씩 지경을 넓혀 무늬를 이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