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북스 (놀 출판사)에서 택배가 도착했다. 서평단에 선정되어 받게 된 책, 양다솔 작가님의 에세이 『가난해지지 않는 마음』이었다.
표지 속 통통 튀면서도 아슬아슬해보이는 일러스트를 보며,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는 청춘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책날개를 펴자 이 책의 저자인 양다솔 작가의 소개가 써 있었다. '어떻게 살아야 할지 도통 갈피를 못 잡는 사람. 마치 눈떠보니 11시인 기분이다.'로 시작하는 글이었다. 나는 단번에 직감했다. 이 책을, 양다솔 작가를 좋아하게 되리라고.
10년간 쓴 수필을 모아 『간지럼 태우기』라는 독립출판물을 발행했고, 동북구연이라는 스탠드업 코미디 그룹에서 활동하고 있으며, 대책 없이 백수가 되는 바람에 울며 겨자 먹기로 '격일간 다솔'이라는 메일링 프로젝트를 시작했다고 하는데, 나는 이제야 우연한 기회로 그녀를 알게 되었다. 조금 더 빨리 알지 못했던 건 아쉽지만, 그동안 써온 글들 중 재미있는 글들만 모아 이 책에 담았다고 하니 조금 위안이 된다.
이토록 내가 애정하게 된 양다솔 작가님의 책 『가난해지지 않는 마음』의 일부를 기록해둔다.
일상은 비슷하게 계속되었다. 한동안은 책만 읽었다. 서점이나 도서관에 가서 마음에 드는 책을 발견하는 족족 집어 와서 쌓아놓고 야금야금 읽었다. 그러다 배고프면 맛있는 걸 해먹었다. 고양이들과 뒹굴뒹굴하고, 늘어지게 낮잠을 자고, 영화를 보고, 뜨개질을 하고, 한강을 달리고, 등산을 했다. 일을 안 한다는, 돈을 안 번다는, 직장이 없다는, 미래가 없다는 사실 말고 모든 것이 평안했다. 마치 절벽 위에 텐트를 친 듯한 기분이 들었다. 아슬아슬하고 평화롭고 아찔하고 몹시 아름다웠다. 절벽에서 보이는 절경처럼. p.18
냉동고에 꽝꽝 얼려둔 두유를 절구로 매우 쳐서 잘게 부쉈다. 거기에 팥 두둑이 덜고 시럽 조금과 콩가루를 아낌없이 부었다. 팥빙수는 누구도 빼앗을 수 없는 여름의 별미다. (...) 얼얼하고 달큰하고 고소한 빙수가 입안에서 사르르 녹았다. 그릇 위로 숟가락이 정신없이 오갔다. 참 내, 벌써 몇 달째야. 시간은 쏜살같이 지나가고, 여전히 뭘 해야 할지 전혀 생각이 안 나네. 나는 생각했지만, 당장 앞에서 팥빙수가 녹아가고 있었다. 아무도 해치지 않는 팥빙수. 함께 나눠 먹는 팥빙수. 절병에서 보이는 풍경은 오늘도 아름답고, 나는 시간이 갈수록 정말 이상하게도, 전혀 가난해지지 않는다. p.20
어쩌면 나의 조상은 수렵 채집인인지도 몰랐다. (...) 오늘의 먹을 거리와 머물 곳을 찾아다니며, 매일 하루를 마치 하나의 삶처럼 살아내던 이들. 스스로 서 있는 곳을 장악하고, 손으로 만질 수 있는 것들을 지배하는 능력이 삶의 질을 좌우하던 시간들. 당장 내일도 아닌 바로 지금, 이 순간에 온전히 살아 있지 않으면 목숨을 부지할 수 없었던 수만 년 역사의 주인공들. 나는 스스로가 바보처럼 느껴질 때면 그들을 떠올리곤 했다. 수만 년 전 내가 사는 이곳에서 누구보다 생생하게 살아 있었을 그들과, 집 안에서 나만의 방식으로 자전하는 내 모습을 떠올렸다. p.46
대학을 다니는 동안 하루를 잘게 쪼개어 서너개의 아르바이트를 하고, 장학금을 지원 받기 위해 자신의 가난을 글에 담고 다른 이들의 가난 위에 서성여야 하는 대학생. 그리고 대학을 졸업한 후 어렵게 취직한 회사가 강남에 있지만 회사 앞에서 자취하는 것은 꿈도 못 꾸고, 그나마도 회사에서 언제 잘릴지 알 수 없는 하루하루를 견뎌내는 사회초년생.
하지만 그녀는 기념일마다 들여놓은 차호(찻주전자)로 그날 마시고 싶은 차를 골라 마시고, 고양이 두마리와 돌침대, 벤저민 나무를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이다. 그리고 그녀에게는 공장에서 일해온 자신의 10년(이 담긴 돈)을 기꺼이 주며, 목욕탕에서 책을 읽고 있는 딸 옆에 앉아 말없이 책을 꺼내는 엄마가 있고, 삶에서 가장 웃긴 사람이었던 아빠가 있었으며, 자신이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도 무관심한 태도로 일관하며 그게 무엇이든 그저 나라는 것을 알고 있는 듯해서 마음껏 뛰어놀 수 있게 해준 친구들이 있다.
문득 이 책을 읽으며 영화 <소공녀>가 생각났다.
소공녀, 감독 전고운, 출연 이솜, 안재홍, 개봉2018. 03. 22.
"하루 한 잔의 위스키와 한 모금의 담배 그리고 사랑하는 남자친구만 있다면 더 바라는 것이 없는 3년 차 프로 가사도우미 ‘미소’. 새해가 되자 집세도 오르고 담배와 위스키 가격마저 올랐지만 일당은 여전히 그대로다. 좋아하는 것들이 비싸지는 세상에서 포기한 건 단 하나, 바로 ‘집’. 집만 없을 뿐 일도 사랑도 자신만의 방식대로 살아가는 사랑스러운 현대판 소공녀 ‘미소’의 도시 하루살이"를 담은 영화다.
영화 <소공녀>를 보면서 느꼈던 감정의 풍요를 『가난해지지 않는 마음』을 읽으면서 느꼈다. 나는 이런 부류의 사람에게 약하다. 가난하지만 자신만의 취향이 확고하고, 마음속에 견딜 수 없을 정도의 뜨거움과 차가움, 쓸쓸함과 견고함을 동시에 가진 자신만의 '고유의 분위기'를 가진 사람.
이 책은 그런 이야기를 담고 있었다. 삶의 목적이 자본가가 된다거나, 상품 가치가 높은 사람이 된다거나, 소비력을 많이 갖는 데에 있지 않으며, 나만의 고유의 분위기가 갖고 싶어서 오롯이 그것만을 위해 고군분투하는 한 사람의 이야기.
책을 읽기 시작하자 그녀의 삶의 여러 단면이 사정없이 나를 덮치고, 뒤흔들다가 어느 순간 묘한 위안과 용기를 주는 글들을 보면서 이따금 책을 내려놓고 잠시 심호흡을 해야만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답게, 살아가야 한다'는 결의를 다지게 하는 이 책이 나는 무척 이상하게 느껴졌지만, 그래서 더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