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흘.
올해도 한국에 다녀왔다.
“수용하다가 무슨 뜻이야?” 차를 타고 지나가다가 붙어있는 현수막에 쓰인 표현이 궁금했나 보다. “그 위에 작게 써 있는 말은 또 무슨 뜻이야?" 어느 국회의원의 이름으로 된 ‘민생 회복 지원금’에 대한 요구 메시지였다. '민생'의 뜻을 알려주고, 왜 그런 내용을 써서 붙였는지에 대해서도 설명해 주었다. 그리고 앞으로도 지나가면서 보이는 단어들의 뜻이 궁금하면 얼마든지 물어보라고 했다.
한국에 있는 동안 아이가 다른 사람들과 이야기 나누는 것을 유심히 들었다. 주변 사람들이 대부분 한국인이라고는 해도 해외에서 태어나서 계속 자라왔고, 외국계 학교에 다니고 있는 아이가 한국에서 얼마나 소통을 잘하는지 궁금했다. 다행히 나와는 사용하지 않던 고급 어휘도 사용하고, 영어를 섞어서 말하지 않고, 상대방이 이해할 수 있게 말하는 것을 보며 내심 안심이 됐다.
요즘 워낙 문해력, 어휘력에 대한 논란이 있으니 해외에서 아이를 키우는 입장에서도 더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다. 외국에서 살아도 한국인은 한국인이다.
최근 '추후 공고'라는 말의 뜻을 잘못 이해한 문해력 논란에 대한 기사가 있었다. "추후 공업고등학교가 어디야? 카카오맵에 왜 안 뜨지?". 요즘은 해외나 한국이나 기본적인 어휘력이 문제인 듯하다.
추후追後 : 일이 지나간 얼마 뒤. (네이버 국어사전)
공고公告 : 관청이나 공공단체에서 어떠한 일을 널리 알리는 것.(동아연세초등국어사전)
해외에 사는 아이들도 문해력이 부족하기는 마찬가지다.
"기타 등등이 무슨 뜻일까?" - "......"
"전쟁으로 사람들이 애를 태웠다." - "너무해요. 어떻게 자기 애를 태워요? 잔인하잖아요"
'태우다'불에 태우다는 의미로 받아들인 경우.
"미국인, 중국인, 독일인... '인'은 무슨 뜻인지 알지?" "......"
'인(人)'이 사람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모르는 경우. 추가로 한국어, 일본어, 베트남어에서 '어(語)'의 뜻을 알려준다.
모든 학생의 수준이 이런 것은 아니지만, 국제학교에 다니면서 한국어 어휘력이 많이 부족한 학생들을 만날 때면 기초적인 어휘와 꼭 알아야 하는 한자어를 가르쳐 준다. 한자를 외우라는 것이 아니라 뜻을 알면 글을 이해하기 훨씬 쉽기 때문이다.
상/하, 대/소, 강/약, 고/저, 유/무. 이처럼 쉬운 한자의 뜻도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어서 기초 중의 기초부터 시작한다. 실제로 어휘의 반대말을 써보라고 하면 '예쁘다-안 예쁘다', '빠르다-안 빠르다'라고 쓰는 아이들도 있기 때문에 수업 초반에 아이들의 개별 수준을 확인하는 게 중요하다. 수업 시간이 서로에게 힘든 시간이 되지 않도록 말이다. 자칫하면 "한국어는 너무 어려우니 포기하겠습니다"하고 두 손 두 발 들 수도 있으니.
어휘력이 부족한 학생이나, 다문화권 학생과의 수업을 위해서는 책이나 글 선정에 더 신경을 쓴다. 쉽다고 생각해도 학생들에게는 여전히 어려운 경우도 많다. 학생들이 어휘 공부를 귀찮아할 때는 꼭 상황적으로 설명한다. "네가 유/무의 뜻을 모르면 한국에서 실수할 수 있어. 문서를 제출해야 하는데, 결혼 유/무의 뜻을 몰라서 '유'에 체크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병원에서도 네가 전에 아팠던 경험이 있는지를 체크하는 문서가 있어. 하나도 안 아픈데, 유, 무의 뜻을 몰라서 잘못 체크하면 안 되겠지?"
그리고는 계속해서 반복한다. 계속해서 쓰면서 알아가고, 읽으면서 바뀐다.
"사흘은 며칠?!"
"3일이요!!!!!"
함께 수업하는 학생들이라면 7살이라도 이것만큼은 확실하게 안다. 나와 수업하는 학생들은 절대로 '사흘'과 '나흘'을 헷갈려서는 안 된다고 부탁하며 자주 물어보기 때문이다. 이제는 '사흘'뿐만 아니라 아이들에게 알려줘야 할 것들이 더 많아지고 있다.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당연해지지 않은 시대를 살게 되었으니 나도 빨리 적응해야 한다. 좀 더 쉽게, 좀 더 자세하게, 좀 더 섬세하게.
천자문을 가르쳐주는 서당을 호치민에 열어야 하나. 어휘력 향상을 위해 학생들을 위한 기초 단어를 좀 더 모아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