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 15년.
베트남 생활 15년.
냄비도 15년.
내 결혼 생활과 베트남 생활을 다 지켜봤을 냄비가 오늘 새카맣게 타버렸다. 전기밥솥 대신 냄비 밥을 해 먹기 시작한 이래 가장 큰 대참사였다.
이런 일은 늘 한순간이다. 냉장고에 냄비 째 넣어두었던 밥을 데우려고 인덕션에 올렸다가 타이밍을 잠시 놓쳤더니 연기가 펄펄 났다. 금방 불을 꺼서 살짝 탔을 거라는 생각과 달리, 냄비 상태는 처참했다. 과연 다시 쓸 수 있을까 싶을 만큼.
두껍게 타버린 냄비를 붙들고 이렇게 저렇게 한참을 뚝딱거리고 씨름하고 나니 다행히 원래의 모습을 회복했다. 정말 다행이다. 이게 다 몇 년 전 나에게 멋진 말을 해준 동생 덕이다.
몇 년 전에도 냄비를 태워먹은 적이 있었다. 새까맣게 타서 바닥에 붙어버린 그을음을 지우는 건 너무 어려웠다. 철수세미, 과탄산소다, 베이킹소다, 사과 껍질까지 인터넷에서 찾아본 모든 방법을 동원해도 해결되지 않았다.
“버려야겠지?”
“언니, 버리지 마세요. 몇 년 뒤에 좋은 기술이 나올지 누가 알아요.”
왠지 믿고 싶었던 말, 믿음직했던 그 말.
그 말만 믿고 싱크대 한 구석에 처박아두었던 냄비는 믿음직스러운 동생의 말처럼 몇 년 뒤에 효과 좋은 스테인리스 클리너를 사용해 반짝거리는 냄비로 회복해 다시 빛을 보게 되었다. 그 후로 냄비밥을 먹는 우리 집에 탄 냄비 세척제는 상비약처럼 싱크대 아래에 늘 대기 중이다.
나날이 기술이 발전하는 세상 덕분에 소중한 것들을 지금까지 잘 지키는 중이다.
무언가를 함부로 버리지 못하는 이유.
무언가를 쉽게 새로 사지 않는 이유.
세상은 점점 좋아지고 있기 때문에.
이 세상에는 내가 모르는 좋은 것들이 이미 많겠지? 알고 싶어졌다. 삶의 윤택함을 위하여.
요즘은 한 손으로 책을 들고 볼 때 페이지를 양쪽으로 쫙 펼쳐 고정시켜 주는 책 펼침 도구에 관심이 생겼다. (정확한 이름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