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 줄 아는 건 없지만.
할 줄 아는 요리가 별로 없다. 나름 준비해서 요리해도 시간과 노력 대비 맛은 그냥저냥이고, 열심히 청소해도 시간에 비해 효율이 떨어지는 걸 보면 영 집안 살림에는 소질이 없는 듯하다.
그런 우리 집에도 가끔 손님이 온다. 얼마 전에도 집에 손님들을 초대할 일이 있었다. 차를 마시고, 점심까지 먹어야 했는데, 어느 식당에 갈까 고민하다가 한 번쯤은 집에서 한 끼 대접하는 것도 괜찮겠다 싶었다. 나로서는 대단한 용기였다.
요리도 잘 못하면서 손님상을 차릴 수 있었던 건 몇 년 전에 읽은 책 덕분이다. 갑자기 생각하려니 떠오르지 않는 제목이지만, 조근조근 전해주는 작가의 조언들이 내가 조금은 더 괜찮은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게 해 주었다. 한국을 떠나 배워야 할걸 제대로 배우지 못한 30대에 베트남에 뚝 떨어져 지금껏 살고 있는 나에게 좋은 선배 같고, 언니 같은 책이었다.
어느 집에 초대받으면 꼭 가벼운 선물이라도 가져가라.
좋은 사람들을 위해 대접할 수 있는 요리 몇 가지는 알고 있는 게 좋다.
책을 읽고 지금까지도 마음 깊이 새기며 열심히 실천하는 중이다. 그리고 고마운 사람들에게 기회가 되면 한 번쯤 대접하고 싶어서 열심히 갈고닦은 솜씨로 서너 종류의 요리는 꽤 괜찮은 맛으로 손님들 앞에 내놓을 수 있게 되었다.
그중 하나가 보쌈이다. 메인 요리는 보쌈으로 하고, 냄비밥은 많은 양을 해본 적이 없어 밥 대신 비빔국수를 곁들이기로 했다. 밑반찬은 맛있게 만들 자신이 없으니 욕심 내지 않고 메인 요리로 빛을 발할 수 있는 요리로 보쌈 만한 게 없는 듯싶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메뉴 선택이었다.
보쌈에 꼭 곁들여야 한다고 생각하는 보쌈 무 김치만 하루 전날 만들어 놓고, 아침 7시부터 준비를 시작했다. 고기를 삶고, 비빔국수용 김치와 양념을 준비하고, 과일과 야채 사러 다녀오고. 중간중간 틈틈이 청소까지 하다 보니 겨우 시간을 맞출 수 있었다. 장 정도는 전날 미리 봐둘 걸 후회했지만, 익숙하지 않은 일이었으니 어쩔 수 없다. 이렇게 하나하나 배워가는 거다.
보쌈 무김치와 몇 가지 김치, 쌈야채를 꺼내니 제법 식탁이 가득 채워졌다. 다행히 오신 분들 모두 맛있게 식사하시고, 함께 풍성한 담소를 나누는 시간을 보냈다. 음식이 정말 맛있었다기보다는 시간과 정성에 대한 마음이었을 것이다.
손님상을 한 번 치르고 나니 용기가 생겼다. 생일을 맞은 아래층 동생에게 어떤 선물을 줄까 고민하다가 아침 한 끼를 챙겨주는 것도 좋겠다 싶었다. 미역국을 끓이고, 갓 지은 냄비밥과 밑반찬을 챙겨 생일 아침상을 선물했다. "언니, 몇 년 만에 생일날 미역국 먹네요. 고마워요."
누군가에게 내가 따뜻한 존재로 기억될 수 있다면 행복한 일이다.
젊을 때는 철이 없었다. 제멋대로였다. 내 말을 하기 바빴다. 마흔이 넘은 이제야 나는 조금씩 괜찮은 사람이 되고 있다. 나눌 줄 알고, 도와줄 줄도 아는 사람이 되었고, 말하는 것보다 듣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 되었다. 들은 말은 다른 데로 새 나가지 않는 무거운 입도 생겼다. 그래서 다행이다.
"언니, 미역국 정말 맛있었어요."
"그래? 나 요리 실력이 엄청 늘었나 봐. 안 해서 그렇지 원래 잘했던 건가?"
교만 금지. 우쭐거림 금지.
하지만 생각은 벌써 몽글거린다.
다음엔 부대찌개를 해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