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방인 생각
-최근 1년 사이에 새로운 가전제품을 구입하셨습니까?
-구입하셨다면 어느 종류의 제품을 구입하셨습니까?
세탁기, 냉장고, TV, 청소기...
아니요.
며칠 전 설문조사의 질문이었고, 난 그 무엇에도 해당하지 않았다. '아니요'
정말 그랬다. 1년 사이에 새로 산 가전제품이 없었다. 2년 전까지도 없었다. 그게 무엇이든 전기와 관련된 제품이라고 해도 무선 이어폰, 전자시계, 최근 크리스마스트리 꾸민다고 구입한 건전지로 작동하는 전구가 전부다. 내가 절약 정신이 뛰어난 사람이어서? 그건 아니다. 단지, 15년이 지난 지금도 베트남 생활에 마음을 잡지 못한 이곳에서 자꾸 무언가를 사면 마음의 짐도 같이 무거워질 것 같아서다.
비자를 새로 신청해야 하는 지금은 더 그렇다. 이민 제도가 없는 베트남에서는 몇 년에 한 번씩 비자를 발급받아야 한다. 비자 발급에 문제가 생겨 3달 동안 무조건 한국에 다녀와야 한다는 지인들의 소식을 들을 때면 괜스레 걱정이 되기도 한다. 혹시나 그게 내 일이 될까 봐. 아이는 학교에 다녀야 하고, 우리는 일을 해야 하는데. 도무지 안정감을 느낄 수가 없다.
베트남에 사는 모두가 나와 같은 마음을 가지고 사는 건 아니겠지만(대부분 잘 지낸다), 나는 유독 정을 붙이지 못했다. 베트남 음식은 누구보다 가리지 않고 잘 먹고, 호치민 시내의 웬만한 거리는 알아서 걸어 다닐 만큼 지리도 잘 알고 있지만 마음의 문제는 별개였다.
이런 나는 잘 살고 있는 것일까, 못 살고 있는 것일까.
15년째 마음을 정착하지는 못했지만, 그 대신 미련 없이 떠날 수 있는 유목민의 마음을 장착한 가벼움을 온몸으로 체득한 거라고 좋게 생각하기로 해보는 건 어떨까. 그러니 어느 나라 어디서든 지금처럼 가볍게 살 수 있지 않을까? 조금 외로워도 괜찮고, 낯설어도 괜찮다. 지금처럼 누군가와 눈인사를 주고받고, 쌍방이 아닌 나 홀로 단골이 되어 익숙함을 느끼는 커피숍 하나, 식당 하나, 마트 하나... 그 정도면 된다.
그래도 머무는 시간이 많은 집의 바깥 풍경은 좋았으면 좋겠다. 답답하지 않게. 가만히 보고만 있어도 기분 좋을 수 있게. 지금 집이 그래서 다행이다. 창밖을 보면 사이공강이 흐른다. 하늘도 가까이 있다. 예고 없이 비가 쏟아지던 날, 눈앞에서 아주 커다란 쌍무지개를 보는 행운을 얻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태도와는 정반대로 많은 이들이 한국으로, 다른 곳으로 떠나는 이번 크리스마스 방학과 베트남 설 명절에 호치민을 지키기로 했다. 유목민으로 산다는 마음과 달리 몸은 이곳에 뼈를 묻을 기세로 정착 중이다. 민망하니 여권과 비자 갱신 기간이라는 핑계를 얹어서.
언제까지일지 모르지만 베트남을 떠나는 그날까지 가볍게 살고 싶다.
오늘도.
내일도.
내년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