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쓰겠지? 안 써.
거실 통창이 동남향으로 나 있는 우리 집은 밝고 깨끗한 편이다. 집안 관리의 주도권이 나에게 있다 보니, 집안 분위기도 내 성향을 따라간다. 뭔가 사들이는 것을 좋아하지도 않고, 언제든 살던 이곳을 떠날 수도 있다는 생각으로 살다 보니 최근 10년 가까이 크게 살림살이의 변화가 없다.
정리정돈에 대한 습관도 나쁘지 않다. 먹은 건 바로바로 설거지하는 편이고, 밤에는 자기 전에 거실과 서재를 정리한다. 5분이면 충분하다. 벌써 5년이 넘은 루틴이다. 그래야 다음 날 기분 좋게 하루를 시작할 수 있다. 그릇에도 취미가 없으니 딱 세 식구 먹고살기에 필요한 만큼만 있고, 냉장고도 항상 공간이 넉넉하다. 바쁘다보니 요리에 할애할 시간이 많은 것도 아니고, 식구들 모두 한 번 먹은 음식은 냉장고에 들어갔다 나오면 도통 먹을 생각을 안 하니, 그때그때 한 그릇밥을 만들어 먹는 게 훨씬 낫다. '이거로 요리하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산 재료는 그대로 유통기한이 지난 채 버려지는 경우가 많아 정말 먹을 것만 사는 편이다.
우리 집에는 수납장도 별로 없다. 눈에서 멀어지는 건 마음에서도 멀어진다고, 서랍에 들어가는 순간 잊혀져서 같은 소모품이 몇 개씩 쌓이기도 하고, 눈에 안 보이면 안 쓰게 되니 꼭 필요한 몇 개의 수납장만 두고, 그 안에 수납할 만큼의 물건만 두는 편이다. 물론 마음과 달리 쌓이기도 하지만.
그런데도 문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림살이가 차고 넘쳐난다는 것이다. 정리한다고 작정해도 힘은 힘대로 쓰고, 바뀌는 건 별로 없었다. 버리고 싶은데 더 이상 버릴 게 없으니 수납을 잘 못해서인가 싶어 수납장을 하나 더 사야 하는가를 고민하던 중 어느 유튜브 채널을 보면서 나의 근본적인 문제를 알게 됐다. 나는 묵은 것을 잘 버리지 못하고 있었다. 언젠가는 쓸 것 같아서, 언젠가는 입을 것 같아서, 선물 받은 거라서, 추억의 물건이라서, 그리고 무엇보다 아까워서라는 강력한 이유로 버리지 못하는 것이 곳곳에 쌓여 있었다.
생각해 보면 언젠가는 쓸 것 같은 것은 그 언젠가가 오지 않는 게 대부분이었다. 특히 나무젓가락은 늘 주문을 할 때마다 쌓이니 굳이 묵혀둘 필요가 없었다.
언젠가 입을 것 같은 옷은 몇 년째 옷장을 지키고 있었다. 옷장을 열 때마다 풍요 속의 빈곤을 느끼는 건 언젠가는 입을 거라며 비워내지 못한 내 취향이 아닌 옷들과 유행 지난 옷들, 누군가 입으라고 준 옷들이 차지하고 있는 자리 때문이었다.
게다가 집안 구석구석 넘쳐나는 아이의 소중한 추억의 물건들도 집안을 어수선하게 만드는 데 한 몫했다. "선생님이 선물로 준 거야", "친구가 준 거라 소중해", "정말 아끼는 거야"라는 말에 버리지 못하고 여기저기 들어가 있는 물건들이었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아이에게는 그 순간에만 소중할 뿐 돌아서는 순간 잊혀진 것들이었다. 그저 그 순간의 아이 감정에 이입되어 '아이에게 소중한 물건'이라는 이유로 내가 버리지 못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래서 오늘부터 100일 동안 '버리기 프로젝트'를 시작하기로 했다. 하루 이틀 동안 버리는 건 늘 그랬듯이 금세 포기할 것 같지만, 100일 동안이라면 집안 구석구석을 돌아오며 살림 다이어트를 천천히 해나가면 될 것 같았다. 오늘 꼭 다 정리해야 한다는 부담도 없으니 루틴도 만들고,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 과정을 매일 기록하기로 했다.
오늘 나는 무엇을 버렸는가.
[버리기 1일 차]
-주방 서랍에 묵혀 있던 나무젓가락과 일회용 숟가락 등(오늘 또 새로 나무젓가락이 생김)
-올림 머리할 때 쓴 머리핀(평생 쓸 일 없을 듯)
-아이가 어렵게 내놓은 쓰지 않는 가방 2개와 소중하다며 아무 데나 둔 작은 물건들 한 봉지
-물건 박스를 버리지 않는 남편이 쟁여둔 박스들
-일회용 스타벅스 컵과 낡은 플라스틱 컵들
-오래된 영양제(의사가 먹지 말라고 해서 어쩌다 보니 방치된)
-물건을 살 때마다 받아와서 습관처럼 모아두었던 비닐봉지들
*그 외 아이의 작아진 옷
-지인의 자녀에게 물려줄 것과 8월 의료 봉사 때 기부할 옷을 나누어 정리하기로 했다.
작은 방 한 구석에서 선반처럼 쓰이던 턴테이블이 버리는 과정 중에 눈에 띄어 거실로 진출했다. 여러모로 도움이 될 것 깉은 100일 프로젝트다.
그리고 오늘의 물건을 버리면서 내일의 버릴 물건을 생각했다. 과연 나는 내일 그것을 버릴 수 있을까? 아까워져서 못 버리면 어쩌지? 괜찮다. 나에게는 아직 99일이 남아있으니까. 그 시간 동안 마음이 변했을 때 얼른 버리면 된다.
설마 100일 후에 우리 집이 텅 빌 일은 없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