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지 않은 책을 버리는 건 어렵다.
그렇다고 읽지 않을 책을 계속 가지고 있을 수도 없다. 그래서 생각과 행동을 바꾸기로 했다.
일단 읽자. 그 후에 나누든, 버리든, 정리하자.
이렇게 마음을 다잡고 짬짬이 책을 읽는 중이다. 대부분 주변에서 받은 책들이라 연식이 좀 된다. 얼른 손이 가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한 권씩 읽어보기로 했다.
좋은 문장은 밑줄도 시원하게 긋고, 책갈피가 보이지 않으면 책장을 접기도 한다. 책장을 접는 건 거의 해본 적 없는 행동이지만, 이번엔 조금 과감해졌다. 어차피 읽고 정리할 책이니 해보는 거다.
문득 내가 언제부터 책을 좋아했는지 궁금해졌다.
어릴 적 우리 집에는 책이 별로 없었다. 읽을 게 없어서 같은 책을 읽고 또 읽었다. 그 재미없는 방학 독후감용 도 여러 번 읽었다. 방학마다 부산 외삼촌 댁에 가면 어린 사촌 동생들의 디즈니 전집이나 세계 명작 그림책을 읽었다. 지금처럼 영상 콘텐츠가 넘치는 시대도 아니었고, 낮에는 텔레비전을 볼 수도 없었다. 아는 곳이라고는 외할머니댁과 외삼촌 댁뿐인 부산에서 시간을 보낼 방법은 책을 읽는 것뿐이었다. 그래도 '이렇게 귀엽고 재미있는 책도 있구나' 싶은 마음에 몇 번씩 읽었다. 그림책이 지겨워지면 외삼촌의 책장에서 몰래 어른 책을 몰래 꺼내 읽기도 했다. 기억에 남는 건 시드니 셀던 작가의 책이었다. 아마도 <시간의 모래밭>이었던 걸로 기억되는데, 내용은 기억나지 않지만, 어른의 책이 굉장히 재미있다는 걸 느꼈던 것 같다.
아빠도 종종 회사에서 소설책을 빌려다 주셨다. 주로 소설이거나, 에세이였는데 어른의 세계를 미리 보는 것 같아 가져다주시는 책마다 재미있게 읽었다. 제주도 여행을 가서도 부모님이 나에게 사다 주신 선물은 돌하르방이 아닌 <신사임당> 위인전이었다. "우리 딸은 책 좋아하니까."
4학년 정도였는데, 제주도에서 기념 선물로 위인전을 사다 주신 게 섭섭하기도 하고, 이상했던 기억이 지금도 남아있다. 내 선물을 미처 못 사서 뒤늦게 뭐라도 산 건지, 아니면 정말 나에게 그 책을 선물해주고 싶으셨던 건지 궁금하다.
아무튼 엄마 아빠는 주변에도 나에 대해 "우리 딸은 책을 정말 좋아해요."라고 말씀하셨고,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나는 '아.. 나는 책을 좋아하는 아이구나'라고 생각하게 됐다. 하긴, 집에서도 심심하면 안방에 들어가서 엄마의 혼수품이었던 백과사전을 꺼내 읽곤 했으니 '책 좋아하는 아이'라고 생각한 것도 당연했던 것 같다. 단지, 난 남자 형제 사이에서 늘 심심했던 것뿐인데 말이다.
중학교 때는 엄마가 물려받았다면서 두꺼운 세계 명작 전집을 집에 가져오셨다. 한창 공부해야 할 때에 책에 빠져서 열심히 읽었다. 어릴 때 그림책으로 읽던 명작들을 두꺼운 책으로 읽으니 더 재미있었다. 그중에서도 <소공녀> 책이 왜 그렇게 재미있었는지, 일 년에도 몇 번씩 꺼내 읽었다. 일종의 스트레스 해소 전용 책이었다. 지금도 그 책을 생각하면 코끝에서 낡은 책 냄새가 느껴지는 듯하다. <소공녀>는 지금도 한 권 가지고 있다. 아이에게도 권했지만, 나처럼 설레지는 않는 듯하다. 대신 아이는 비슷한 제목의 웹소설을 더 좋아한다.
고등학생이 되면서부터는 용돈을 받아 서점에 가서 책을 사거나, 그 시절 유행했던 도서 대여점에서 빌려 읽었다. '깨비책방'이었던가? 단골 중의 단골 고객이었다. 소설 <동의보감>을 재미있게 읽고 있었는데, 책을 완결하지 못하고 작가님이 돌아가시는 바람에 소설을 끝을 궁금해하며 안타까워했던 기억이 난다. 책 읽기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준 책이기도 하다.
지금도 나는 책과 함께 하는 삶을 살고 있으니, 책 좋아하는 아이로 키워주신 부모님께 고마운 마음도 든다. 하지만 같은 환경에서 자란 오빠와 남동생은 책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그 둘이 책을 읽고 있는 걸 본 기억이 없다. 베트남에 다 들고 올 수 없어서 책은 모두 본가에 두고 왔는데, 이사하면서 동생이 다 중고서점에 팔았다고 했다. 아이가 크면 주려고 했던 <해리포터> 시리즈도 다 팔았다고 했다. 몇 년에 걸쳐 새로운 시리즈가 나올 때마다 서점으로 달려가서 샀던 책이었다. 책의 소중함을 모르는 녀석이라니!
그 둘을 보면 책 읽는 환경만으로 책을 좋아하게 되는 건 아닌 것 같다. 그래도 책 읽는 환경과 부모가 책을 읽는 모습을 보여주는 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독서가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일상이라는 것을 알게 해주어야 한다. 누구에게나 책과 관련해 다정한 추억 하나쯤은 있었으면 좋겠다.
그래도, 이번에는 정말 다 읽고 정리하리라. 다짐, 또 다짐한다.
혹시 모를 일이다. 읽다가 또 한 권의 인생책을 만나게 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