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일] 우리 집에는 비움의 적들이 산다

버리는 놈, 쟁이는 놈, 사 오는 놈

by 정은

비움 프로젝트가 제자리걸음은 아닐까 생각하게 되는 때가 있다. 아이의 방에 들어갔을 때 수북하게 쌓여있는 녀석의 흔적을 볼 때가 그렇고, 상의 없이 물건을 사 오는 남편을 볼 때가 그렇다.


나는 우리 집의 '버리는 자'.

아이는 '쟁이는 자'.

남편은 '사 오는 자'.

(가족들에게 '놈'이라는 표현은 과하니 조금 순화해서 써보기로 한다.)


우리 집의 '버리는 자'인 나는 늘 하나라도 더 버려서 집을 가볍게 만들려고 애쓴다. 그런데 어느 정도 비워진 공간에 만족을 느낄 즈음이면 '쟁이는 자'와 '사 오는 자'가 조용히 작당모의를 시작한다. 그리고 어김없이 새로운 물건이 집 안으로 들어온다. 꼭 필요한 거였다며. 분명 집을 정리하는 중이라고 말했는데, 두 사람 모두 별로 신경 쓰는 분위기가 아니다.


현관 입구에는 한 달이 넘도록 뜯지도 않은 택배 상자가 놓여 있다. "일주일 안에 안 치우면 버린다"라고 '사 오는 자'에게 으름장을 놨지만, 곧 정리한다는 말뿐 여전히 그대로다.


'쟁이는 자'의 방에 들어가면 한숨이 절로 나온다. 정리해 주면 금세 다시 쌓고, 또 쌓는다. 온갖 종이, 인형, 쓰다 만 공책들... 만들다 만 것들과, 무언가 끄적인 낙서들. 집안의 모든 작은 것들은 '쟁이는 자'의 방에 모여드는 듯하다. 작은 인형부터 큰 인형까지 사연 없는 것이 하나도 없다. 지금은 쓰지 않는 학교 사물함 열쇠도 기념으로 가지고 있겠다고 한다. 세상 모든 먼지까지도 소중해서 버리지 못하고 간직할 기세다. 사춘기의 마음은 정말 이해하기 어렵다.


'사 오는 자'는 이번에도 선반에 라면을 가득 채워놨다. 참고로 우리 가족은 다들 라면을 잘 안 먹는다. 세일해서 사 왔다지만, 그동안 유통기한이 지나는 바람에 버려진 라면인 몇 개인줄 전혀 생각 못하는 듯하다. 그리고 이미 있는 걸 또 사 오는 건 '사 오는 자'의 취미생활인 듯하다. 포크가 있는데도, 안 보였다면서 사온 포크는 거의 무기 수준의 삼지창 같은 것들이고, 국자도 크기별로 세 개나 있는데 또 사 왔다. 물병도 여전히 멀쩡하지만, 또 사 왔다. 가장 이해가 안 되는 건 집에서 한 번도 석화를 먹어본 적이 없는데, '석화 까는 칼'을 사 온 일이다. 역시 '사 오는 자'의 마음도 정말 이해하기 어렵다. '사 오는 자'에 대해 할 말은 정말 많지만, 참는다.


나의 습관에도 문제가 있었지만, 물건이 넘쳐나는 데는 이 둘의 역할이 크다. "이거 안 쓰는데 버릴까?" 하고 한 마디 하면 '쟁이는 자'와 '사 오는 자'가 눈에 불을 켜고 나를 본다. 그리고는 한 마음이 되어 자신들이 그 물건을 얼마나 잘 쓰고 있는지 항변한다. 그런데 분명한 건, 내가 그 말을 하기 전까지는 아무도 그 물건(또는 가구)을 쓰지 않았다는 점이다. 혹시 나에게는 '안 쓰는 물건을 쓰게 만드는' 특별한 말의 힘이 있는지도 모르겠다.


여하튼 도움은커녕 우리 집의 '비움 빌런'들이다.

비움은 혼자서는 어렵다. 비움의 적은 세상 밖이 아니라, 아주 가까운 곳에 있었다.

그럼에도 나는 오늘도 묵묵히 하나를 버려본다.

언젠가 우리 집에도 진짜 ‘비움 동맹’이 생길 날이 바라면서.


'사 오는 자'와 '쟁이는 자'는 종종 작당모의를 한다. 대부분 '쟁이는 자'의 부탁을 '사 오는 자'가 거절하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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