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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링귄 Oct 26. 2020

호주 가려다 말레이시아로 가버린 좌충우돌 여행기

전설의 호주키나발루 사건

코로나19 사태가 장기화되면서 집콕이 일상이 됐다. 여행을 가고 싶은 마음에 사진들을 뒤적이다 작년 여름, 코타키나발루에서 찍었던 사진을 발견했다. 함께 여행 갔던 친구와 코타키나발루의 노을을 바라보는 뒷모습이 담긴 사진이었다. 여행이 끝나는 날에 찍어서 더 아쉬움이 가득한 장면이다. 좋은 추억이 가득할 것만 같은 이 여행에 관해 얘기하자면 '어휴'라는 한숨부터 짓고 시작해야 한다. 시작부터 삐거덕거린 황당한 휴가였기 때문이다.

갤러리에서 찾은 사진 한 장. 여행의 마지막 날, 친구와 코타키나발루 노을을 바라보고 있다.

때는 바야흐로 2019년 여름... 회사에서 여름휴가가 일주일 정도 주어졌고 고향 친구가 때마침 회사를 그만둔 시점이었다. 둘은 그동안 머릿속으로만 생각했던 여행을 떠나기로 했다. 바로 호주로 공부하러 간 고등학교 친구를 보러 가는 것! 항공권과 호텔 등을 다 예약하고 호주에 사는 친구도 우리 계획에 맞춰 모든 일정을 뺐다. 호주에 가서 어떤 걸 할지도 열심히 계획을 짰고 휴가만을 기다렸다. 설레는 마음에 회사 동료들에게도 얼마나 자랑했는지 모르겠다. "김 대리, 오페라하우스 인증샷 찍어와."라는 이야기를 들으며 휴가가 시작되는 전날 기분 좋게 퇴근했다. 같은 날 고향에서 올라온 친구와 함께 행복한 호주 여행을 꿈꾸며 맥주까지 한잔하고 일찍 잠들었다. 


D-day.

티켓 발권 창구와 함께 지옥문이 열리기 시작한다. 우리를 지옥으로 초대하는 직원의 한 마디. "비자는 발급하셨나요?" 그렇다. 비자 발급도 없이 호주를 가려고 했던 것. 말도 안 된다고? 어떻게 그걸 잊어버리냐고? 정말 말도 안 되고 바보 같지만 그랬다. 그동안 무비자로만 해외여행을 다녀왔고 호주는 여행 비자가 필요하다는 것을 몰랐다.


전자로 비자발급이 가능하다고 해서 발을 동동 구르며 시도했지만, 너무 당황한 탓인지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직원들에게 도와달라고 했지만 도움을 받지 못했다ㅜ.ㅜ) 결국 타임 오버. 어이없게도 공항까지 가서 비행기를 보내야만 했다. 다른 루트로는 못 가는지, 왜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 그 자리에서 친구와 한참을 얘기했다. 믿을 수 없는 상황에 공항에서 거의 1시간 정도 더 있었던 것 같다. 공항철도를 타고 집으로 오는데 친구랑 대화도 거의 없이 왔다. 


다음날, 일어나서 호주에 있는 친구에게 사과하고 계획에도 없던 롯데월드에 갔다. 소중한 여름휴가를 허무하게 보내는 것도 싫었지만 집에 가만히 있으면 더 마음이 안 좋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웃기게도 롯데월드 가서 제법 즐겁게 보냈다. 둘 다 단순해서 좋은 점이 있네) 롯데월드를 다녀와서 저녁을 먹는데 불현듯 나온 아이디어.

우리 패키지로 동남아 여행 가자!


귀한 시간을 이렇게 보낼 수 없다는 생각에 즉흥적으로 패키지여행을 골랐고 그렇게 이틀 뒤 코타키나발루로 가는 비행기를 타게 됐다. 코타키나발루 여행을 준비하면서 가장 헛웃음 난 부분은 짐을 쌀 때였다. 우리나라가 여름이기 때문에 호주는 겨울이었고 친구는 서울에 올 때 이를 고려해서 캐리어에 니트나 두꺼운 코트를 잔뜩 가져왔다. 하지만 코타키나발루로 여행지가 변경되면서 여름옷을 몇 벌 사야만 했다. 


우여곡절 끝에 도착한 코타키나발루. 결론부터 말하면 코타키나발루 패키지여행은 이미 망했다고 생각한 여름휴가를 살린 선택이었다. 급하게 고른 것인데도 저렴한 가격이었고 패키지 일정도 마음에 들었다. 패키지 인원은 단 4명. 친구와 나, 그리고 부산에서 왔다는 커플 한 쌍뿐이었다. 모르는 사람과의 여행이지만 소수 인원이라 서로 피해 주지 않으려 신경 쓴 덕에 불편함을 못 느꼈다. 


코타키나발루 여행을 간다면 꼭 추천하고 있는 코스는 바로 반딧불 투어다. 울창하게 자란 맹그로브 나무들 사이로 강이 흐르고 그 강을 따라 사람들이 탄 배가 이동을 한다. 투어를 진행하시는 현지인 분들이 배의 조명을 끄면 온통 어둠이 내려 깜깜하게 바뀐다. 잠시 어둠에 적응하고 주위를 둘러보면 나무 사이사이로 반짝이는 불빛이 눈에 띈다. 그 불빛들이 우리가 탄 배 가까이 날아왔다. 그 불빛을 조심스럽게 손안으로 담으면 반딧불을 확인할 수 있다. 살면서 반딧불을 처음 본 날이었다. 부모님이 가끔 이야기하신, 유튜브에서나 보던 반딧불을 직접 보다니. 잠시 구경한 후 손을 펼치면 반딧불이 다시 저 멀리 날아갔다. 그 모습도 신기했다. 반딧불만큼 기억에 남는 장면은 별이었다. 말 그대로 쏟아질 것 같이 무수히 많은 별들이 머리 위에 있었다. 요즘은 시골에 가도 이렇게 많은 별을 볼 수 없는데 여태 본 밤하늘 중에 가장 예뻤다고 단언컨대 말할 수 있다.


가장 예쁜 사진을 많이 건진 코스는 호핑투어. 코타키나발루 패키지에서 빠지지 않는 일정이라고 한다. 다행히 호핑투어 당일 쾌청한 날씨 덕에 사진을 찍는 족족 베스트컷이 나왔다. 수영도 못 하면서 수영복을 입고 이리저리 포즈를 취했고 물장구 수준이긴 하지만 물놀이를 즐겼다. 호핑투어 중에 친한 직장동료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호주에서 캥거루랑 놀고 있니?


순간 뇌 정지가 왔다. 뭐라고 답을 해야 할까. 코타키나발루라고 말하려고 했다가 이야기가 너무 길어질 것 같고 특히 창피한 마음이 커서 호주인 척 사진을 보냈다. 호주에서 사는 친구가 보내준 시드니의 오페라하우스 사진. 직장동료는 아무것도 모른 채 '역시 호주구나. 부럽다.'라며 답을 해줬다. 맛있는 걸 사가겠다며 얼른 대화를 종료했다. (나중에 회사로 복귀해서 코타키나발루에서 사간 간식을 줬더니 어리둥절하게 쳐다보는 동료들의 표정을 잊을 수 없다)

직장동료에게 여행을 잘 즐기고 있다는 의미로 보낸 사진.


그 외에도 코타키나발루에서 랜드마크로 꼽히는 사바 주립 이슬람사원도 눈으로 담았고, 선셋으로 유명한 마사지샵에서 호사도 누렸다. 함께 여행한 커플과도 어느덧 친해져서 현지 시장에서 산 리치를 까먹으며 수다를 떨기도 했다. 여행 마지막 저녁에는 워터프런트에서 바라본 일몰도 좋았다. 


친구와 가만히 일몰을 보자 다사다난했던 여름 휴가가 파노라마처럼 휘리릭 지나갔다. 희로애락이 다 담겨있었다. 비자발급 때문에 호주로 못 간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나 자신에게 너무 화가 났고, 이 사실을 호주 친구에게 전해야 한다는 사실이 슬펐고, 코타키나발루에 와서 반딧불을 손에 올려두며 기뻐했고 호핑투어를 하며 즐거웠다. 평생 이 일을 잊지 못할 거다. 분명 인상적인 여행이었지만 친구와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더는 익사이팅한 여행은 하지 말자며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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