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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링귄 Nov 02. 2020

할아버지, 계신 곳은 어떠세요?

평생의 예쁜 막내 딸이었던 우리 엄마에게도 알려주세요.

2019년 어느 여름날. 엄마에게서 전화가 한 통 왔다. 업무시간에 어쩐 일로 전화를 하신 건지 어리둥절하게 받았다. 외할아버지의 부고 전화였다. 놀라지 말고 들으라고 말하는 엄마의 목소리는 낮았고 떨렸다. 


그래, 올 것이 오고야 말았다. 1~2년 새 부쩍 노쇠하신 게 눈으로 보였던 80대의 할아버지는 식사하기도 힘들어하셨고 주무시는 시간이 점점 길어졌다. 나중에 들어보니 아침 식사까지 하시고는 잠자리에 들듯이 스르륵 돌아가셨다고 한다. 할머니는 당시 치매 증상 초기셔서 할아버지가 여느때처럼 주무신다고 생각하고 이불을 덮어주셨다고 한다. 


언젠가는 올 일이라고 예상했음에도 놀랄 수밖에 없었다. 아주 어릴 때 증조할머니가 돌아가신 걸 본 적이 있지만, 그때 나는 '죽음'이라는 단어가 크게 와 닿지 않았다. 그 이후로 가까운 사람의 죽음을 마주하는 게 처음이었다. 당황스러웠다. 당장 어떻게 해야 할지 잠깐 버퍼링이 걸렸다. 회사에 먼저 말씀을 드리고 이튿날 일찍 시골로 내려가기로 했다. (조부상에 비해 외조부상은 유급휴가가 1일 적다고 한다. 뭐 그런 법이 있지?)




경부선 KTX를 타고 내려가는 길. 엄마가 걱정됐다. 엄마는 4남매 중 막내셨고 할머니와 할아버지의 늦둥이 딸이다. 엄마의 유년 시절, 할아버지는 집 마당에 닭을 키우셨는데 암탉이 갓 낳은 알을 장남보다 어린 엄마에게 먼저 주곤 하셨다는 에피소드만 들어도 할아버지의 각별한 애정이 느껴졌다. 실제로 장성한 딸이 둘이나 있는 엄마에게 할아버지, 할머니는 아이 보듯이 걱정하곤 하셨다. 그런 아버지가 돌아가셨으니 엄마의 상심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부랴부랴 장례식장을 찾았다. 난생처음 상복을 입었다. 평소 화장을 하지 않고는 밖에 안 나가는 편인데 화장은 고사하고 머리도 제대로 못 빗었다. 도착했을 때 이미 염과 입관을 마치고 조문객들을 맞고 있었다. 할아버지의 마지막 모습을 보지 못했다는 것을 아직도 후회한다. 하필 여름휴가 시즌이라 팀장님이 휴가를 떠나셨고 차석인 내가 바로 자리를 뜰 수 없어서 2일 차에 내려간 것이지만 지금까지도 마음이 아프다. 개인 사정이 있더라도 업무에 책임감을 가지는 것이 어른이겠지. 할아버지의 장례식장에 회사 노트북을 챙겨온 나의 모습을 잠시 내려다봤다.


빈소에 놓인 할아버지의 영정사진을 마주했다. 기력이 쇠하시기 전의 얼굴이셨다. 많은 꽃 사이에 덩그러니 놓여있는 영정사진을 보자 그제야 실감이 났다. 할아버지는 돌아가셨다. 외가댁 문을 열면 날 무릎에 앉히시던 할아버지, 밥 먹을 때마다 생선 살을 발라주시던 할아버지, 오토바이 앞에 날 태우고 간 동네 아이스크림 공장에서 빙빙바 한 상자를 사주시던 할아버지, 요즘 애들이 가장 좋아하는 게 양념치킨으로 생각하시고 주문해주시던 할아버지, 노인대학에서 졸업장을 땄다며 자랑하시던 할아버지, TV 리모컨을 쥔 채 잠이 드시던 할아버지... 우리 할아버지는 이제 없다. 


동생과 나는 할아버지의 영정사진 앞에서 펑펑 울었다. 눈물샘이 고장 난 것처럼 운다는 말이 이럴 때 쓰는구나 싶도록 계속 울었다. 잠시 눈물이 그쳤다가도 조문객이 찾아와 인사를 하면 또 눈물이 나왔다. 아마 얼굴이 엉망이었을 것 같다. 너무 울어서 눈이 퉁퉁 부었겠지. 엄마와 이모도 마찬가지였다. 진정된 모습도 잠시뿐, 불현듯 찾아오는 슬픔에 "아버지~ 아이고 우리 아버지~"하고 아이처럼 엉엉 우셨다. 




잊고 있었던 사실인데 나의 할아버지는 타고난 '인싸'셨다. 살아생전 사람을 좋아하시고 본인이 나서길 참 좋아하셨다. 젊은 시절 작은 마을의 수도 관련 공무원으로 일하셔서 집집마다 다니며 수도관을 손보신 탓에 모르는 이웃이 없으셨고, 시골로 이사를 하신 이후에도 오토바이를 타고 다니시면서 잡동사니를 주워오시거나 이웃집을 공짜로 수리해주곤 하셨다. 나이가 드신 후에도 노인대학이나 게이트볼 동호회 등을 나가셨다. 노인대학에서 회장 자리를 꿰차시고는 득의양양하게 자랑하시던 목소리가 아직도 기억이 난다. 오죽하면 나를 포함한 모든 가족이 '세상 요란스럽게 사시던 분이 임종 직전에는 어쩜 그리도 유언도 하나 남기지 않고 조용히 가셨냐'는 소리를 했다. 


평소 할머니 잔소리 따발총의 주요 원인이 된 할아버지의 인싸력은 많은 조문객의 슬픔으로 이어졌다. 가장 큰 빈소를 빌렸음에도 늦은 밤까지 자리가 없이 시끌벅적했다. 많은 사람들이 할아버지의 부재에 슬퍼했다. 신기한 건 누군가를 떠나보내는 마음에는 슬픔만 있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조문객 맞이가 끝날 무렵에는 생전 할아버지와의 에피소드를 떠올리다가 가족들끼리 웃기도 했다. 돌아가신 분에 대한 그리움 안에는 예쁘고 좋은 추억도 있었나 보다. 


많은 조문객들이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경위를 듣더니 입을 모아 말씀하셨다. 호상이라고. 흔한 지병 없이 주무시듯 돌아가셔서 큰 복을 받은 거라고. 나중에 안 것이지만 장례식장에서 호상이라는 말이 예의가 아닐 수 있으니 조심해서 사용해야 한다고 한다. 하지만 나는 그 말이 좋았다. 그 말을 들으니 안심이 됐다.


내 기준에 할아버지는 좋은 사람이다. 손녀인 내가 봐도 해맑고 유쾌한 분이셨다. 악의를 가지고 남에게 해를 끼칠만한 사람은 못 되셨고 별의별 식물을 마당에 키우시고 어디서 데려온 지 모를 누렁이들을 키우는 게 일상의 행복이셨다. 선하게 사신 만큼 복을 누리고 편하게 가신 거란 생각이 들었다. 나는 지금도 말한다.


아마 우리 할아버지는 하늘나라에서도 여러 사람 안면 트느라 바쁠걸?
어쩌면 거기서도 이미 감투 하나쯤 쓰셨을지도.


어느새 장례절차 막바지를 향하고 있었다. 발인식이 시작되자 그쳤던 눈물이 다시 터졌다. 화장터로 향하는 장례식장 직원들을 막고 싶었다. 돌이킬 수 없는 걸 알면서도 더는 할아버지를 볼 수 없다는 생각에 마음이 아팠다. 시신 한 구를 화장하는데 약 2시간 정도 걸린다고 한다. 생각보다 짧은 시간이었다. 조금 충격적이게도 화장이 끝난 시신을 완전히 재가 되도록 부수는 장면도 유가족들에게 보여줬다. 아마 금니 등이 나올 수 있기 때문에 이 점을 명확하게 하려는 이유인 것 같다. 하지만 정말 충격이었다. 할아버지의 두개골은 다 타버려서 겨우 형태만 갖추고 있었다. 우리가 보는 앞에서 망치 같은 도구로 부쉈다. 이 과정 전에 직원들이 충격적이실 수 있으니 어머님들은 보시지 말라고 하셨는데 그럴 만 했다. 나는 할 말을 잃었고 엄마와 이모는 거의 기절 하듯이 우셨다. 결국 완벽히 한 줌의 재가 되었다. 꽤 키가 큰 편이셨던 할아버지가 고운 재 상태로 남겨진 모습이 허무하고 슬펐다. 할머니가 그 자리에 안 계셔서 참 다행이었다.


납골당 안치까지 모든 절차가 끝났다. 볕이 잘 드는 자리였다. 지팡이를 짚고 할머니도 오셨다. 안치된 할아버지 앞에서 절을 하는 4남매와 손주들, 그리고 아무것도 모르고 뛰어노는 아장아장 증손주까지. 그때 할머니는 무슨 생각을 하셨을까. 나는 체구가 한층 더 작아지신 할머니의 모습을 한참 바라봤다. 


내가 80살까지 산다고 가정했을 때 언젠가 부모님의 장례식도 보는 순간이 올 거다. 부모님은 지금부터 말씀하신다. 나중에 수목장해달라고. 그냥 뿌렸으면 좋겠지만 나와 동생이 힘든 순간에 심적으로 의지할 공간이 있었으면 한다고 얘기하셨다. (유골을 그냥 뿌리는 건 불법이기도 하다) 엄마도 할아버지 납골당을 가실 때마다 작게나마 의지가 되셨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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