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크푸르트-로텐부르크-뤼데스하임-하이델베르크-마르부르크
여행 프로그램을 보면 TV 속 출연자들이 멋진 풍경을 보면서 넋이라도 나간 듯이 감격하는 장면이 꼭 나온다. 하지만 몇 번 여행을 해봐도 감동까지는 느껴본 적이 없었다. 새로운 곳에서 새로운 음식과 문화를 접해도 '재미'의 관점에서 여행을 즐겼다. 여행 프로그램에서 흔히 보는 그러한 장면들은 방송에서 필연적으로 나올 수밖에 없는 과장된 연출로 이해했다. 하지만 지금은 생각이 바뀌었다. 내 인생 최고의 힐링 여행을 만났기 때문.
직장생활 4년 차에 막 접어든 난 위기를 맞았다. 심각하게 번아웃이 와 버린 것. 당시 다니던 회사는 내 고충을 듣고 2개월의 휴직 기간을 줬다. 쉴 틈 없이 일하다가 갑작스럽게 휴식이 주어지니 바보처럼 한 달을 누워만 지낸 것 같다. 나도 알고 있었다.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힘들었던 과거를 계속 곱씹는 데에만 힘을 빼고 있단 걸. 이렇게 시간을 허비할 수 없단 생각에 친구와 유럽 여행을 계획했다.
프랑스 파리, 스페인 바르셀로나, 체코 프라하 등 많은 여행지가 있었는데 여행을 자주 다녔던 친구와 유럽 여행은 처음인 내가 공통으로 가고 싶은 나라를 찾기란 여간 어려운 게 아니었다. 긴 고민 끝에 선택한 곳은 독일 프랑크푸르트. 결정적인 이유는 전혀 없었고 그저 둘 다 'Not bad'한 곳으로 선택하게 됐다. 주변에 독일 여행을 가본 사람도 없었고 인터넷으로 검색해봐도 대부분 베를린, 뮌헨 여행 후기가 더 많아서 여행계획을 짜는 데에 고민이 있었다. 일단 너무 빡빡한 일정은 싫다는 게 공통된 의견이었고 프랑크푸르트 한인 민박집에서 일주일간 묵으며 근교 여행을 하기로 했다.
긴 비행 끝에 도착한 프랑크푸르트. 마침 2018 월드컵 시즌이라 많은 사람이 야외 테라스에 앉아 맥주를 마시며 축구 생중계를 보고 있었다. (도착한 날짜에 독일-멕시코전이 열렸고 멕시코의 승리로 거리는 침울한 분위기가...ㅎㅎ) 승패를 떠나 북적이는 거리의 첫인상이 참 좋았다.
독일은 다채로운 매력의 소도시가 모여있는 나라였다. 유럽의 정취를 잠시 느끼고 소시지와 맥주를 실컷 먹을 거로 생각했는데 그 이상의 즐거움이 있었다. 특히 일반적으로 유럽 여행 갈 때 경유지로 스쳐 지나가는 도시인 프랑크푸르트를 선택하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프랑크푸르트에 방문할 계획이 있다면 오디오 가이드 도움을 받아 괴테하우스를 관람하시길 추천한다. 커리부어스트, 학센 등 음식도 맛있다. 술과 고기를 즐기기 완벽한 도시다.
로텐부르크도 추천하고 싶은 소도시 중 하나다. 1년 365일 크리스마스 용품을 판매하는 크리스마스 마켓으로 유명한 곳이라 6월인데도 축제처럼 활기찼다. 그 지역의 가게 간판도 재밌다. 대부분 입체적으로 메탈 간판이 걸려있는데 작품처럼 정교하다. 카페는 커피잔 모양으로, 베이커리는 프레즐 모양의 간판이 걸려있다. 망치로 깨서 먹는 독일 전통 간식인 슈니발렌도 로텐부르크에서 맛볼 수 있다.
철학의 도시, 대학의 도시 하이델베르크와도 가깝다. 아기자기한 느낌이 많이 났던 다른 도시와 달리 뾰족하고 높이 솟은 건물들이 쭉 서 있다. 어딘가 차가운 느낌의 도시였는데(그날 날씨가 춥기도 했다) 강 건너에서 하이델베르크 성을 바라보니 장관이었다. 그 유명한 하이델베르크 철학자의 길도 걸어봤다. 많은 철학자가 걸었다는 그 길... 사실상 등산이나 다름없었다. 친구와 헉헉거리며 그 길을 올라갔다. 둘이 거의 동시에 말했다.
"왜 철학자의 길인지 알겠어. 너무 힘들어서 생각이 많아진다."
가장 인상적인 도시는 뤼데스하임이다. 평화로운 풍경과 질 좋은 포도주로 유명한 마을이다. 프랑크푸르트에서 1~2시간 대중교통을 타야 도착하는 곳인데 유명한 포도주가 궁금해서 여행지로 계획했다. 뤼데스하임에서 생산하는 포도주를 맛보는 게 주목적이었지만 온 김에 곤돌라(케이블카)를 타고 니더발트 언덕 꼭대기로 향했다.
위에서 내려다본 뤼데스하임을 평생 잊을 수 없을 것 같다. 그곳의 모습은 '평화'라는 단어 그 자체였다. 새파란 하늘 아래 포도밭이 드넓게 펼쳐지고 큰 라인강이 가로지른다. 그 강변을 따라 나즈막한 집들이 마을을 이루고 있는데 시간이 멈춘 듯이 조용하고 평화로웠다. 한참을 바라봤다. 시끄러운 속이 차분해지는 걸 느꼈다. 그때 거짓말같이 눈물이 뚝-하고 떨어졌다. 왜 눈물이 났지? 그 정도로 힘들었나?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 순간 마음속 응어리가 풀리는 기분이 들었다. 친구랑 나는 빵 터져서 "주책이다"라며 크게 웃었다.
뤼데스하임에서 기대했던 포도주도 마셨다. 리슬링 와인이라는 화이트와인인데 와인에 대해 조예가 깊지는 않아도 하나는 알 수 있다. "끝내주게 맛있다!" 새콤한 맛이 강해서 식사 중에 곁들이기 좋았다. 가격도 정말 저렴했는데 정확 친구와 나의 취향을 저격해서 다음 날 3병을 한 자리에서 순삭했다. (으휴 지독한 술꾼 둘...) 독일을 가면 맥주를 많이 마실 줄 알았는데 곰곰이 생각해보면 와인 지분율이 더 높았다. 그만큼 맛있었다.
"알럽 리슬링 와인 !!"
일주일간의 독일 프랑크푸르트 근교여행이 끝나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최고의 힐링여행이었다. 물론 그 이후로도 여러 힘든 순간이 찾아왔고 좋은 일만 있는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고민거리를 계속 안고 있기보다는 잠시 도망가서 시간을 번 후에 되돌아보는 것도 좋다는 생각을 했다.
도피성으로 떠난 여행이었지만 얻은 게 많았기 때문이다. 오랜 친구와의 첫 유럽 여행이라는 추억도, 비교적 덜 유명한 작은 도시를 자유여행으로 경험해봤다는 성취감도, 날 괴롭혔던 그 상황에 대해 객관적으로 다시 마주볼 용기도, 무기력한 마음을 잊고 다시 시작하자는 큰 에너지도 가져왔다.
앞으로도 많은 소나기를 만나겠지만 잠시 피한 뒤 고민해보자.
우산을 살지, 친구에게 도움을 청할지, 그냥 맞고 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