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링귄 Dec 23. 2020

숨은 쉬니? 잠수 끝은 이별

최악의 이별방법이라고 하는 그것.

처음으로 남자친구와 갈등을 겪었을 때다. 명백히 내가 잘못한 것이었고 화가 난 남자친구는 잠시 감정을 추스릴 시간을 달라고 했다. 그 말에 펑펑 눈물을 쏟았다. 너무 무서웠다. 이대로 연락두절을 하는 건 아닐까? 

마치 그때처럼.


24살의 나는 별안간 관심도 없던 연애를 하게 됐다. 친구들과 술을 마시다가 이른바 '헌팅'으로 알게 된 X와 말이다. 멀끔한 외모의 X는 말수가 많은 편은 아니었지만 예쁘게 말했고 항상 미소를 머금은 사람이었다. 어린 마음에 '헌팅'으로 만났단 이유로 X가 무섭기도 했지만 시종일관 매너 있는 행동을 보여주는 X에게 호감이 싹터 인생 처음으로 연애를 시작하기로 결심했다.


풋풋하기만 할 것 같은 첫 연애, 참 어렵게만 느껴졌다. 연애 초반은 서로를 알아가는 시간이었다. 아예 접점이 없던 사람이었고 모든게 참 다른 사람이었다. 난 지방에서 학창시절을 보내고 대학교 진학과 취직을 위해 상경해 홀로 살고 꼬박꼬박 월급 받는 월급쟁이 신입사원이었다면 X는 서울에서 가족들과 거주 중이고 음악을 공부했고 대학교 자퇴 후 본인의 사업을 준비하고 있었다. 또 계획적으로 사는 걸 좋아하는 나와는 달리 X는 세상 느긋한 사람이었다.

 

어느 정도 알아갈 때쯤엔 연애감정 자체를 이해하는데 애를 먹었다. 드라마에서나 보던, 혹은 친구에게만 듣던 연애는 핑크빛 가득할 것 같았는데 막상 직접 해보니 새로운 유형의 인간관계일 뿐이었다. 친구와의 우정과 비슷한 부분이 있지만 근본적으로 차이점이 컸고 'one of them'이 아닌 'only one'이란 개념이 쉽지 않았다. 심지어 X가 속상하게 해서 힘들어 했던 적이 있는데 그때 처음으로 '아, 이런 게 연애인가봐'라며 X때문에 고민하는 내가 신기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만난지 100일이 지나니 점차 익숙해졌고 그 뒤 몇 달간 행복하게 연애 중인 상태를 즐겼다. 연애를 시작하면서부터 매일 아침마다 오는 X의 굿모닝 인사도 좋았고 주말이 기다려지는 데이트도 좋았다. 좋은 기억은 찰나였다. 성격 차가 커서 자잘한 갈등이 생겼고 가장 큰 갈등은 데이트 약속을 잡는 것이었다. 


나: 우리 이번주는 홍대에서 볼까?

X: 그래. 토요일 어때?

나: 좋아. 몇시에 볼까?

X: 그건 아침에 일어나서 정하자.


아침잠이 많고 매번 느긋하게 약속을 잡는 X. 햇볕이 좋은 시간에 공원을 산책하는 것을 좋아하고 매일 8시면 일어나는 나. 데이트하는 날이면 아침부터 X의 연락을 기다려야 하는 신세였다. 그 전 연애상대는 동네에서 알고 지내던 사람이었다던 X는 항상 이렇게 데이트 약속 잡았는데 무슨 문제가 있냐는 식이었고 데이트하는 동안에는 서로 좋았지만 그외 마찰이 생기는 부분때문에 점점 연애를 하는 게 힘들었다. 


그래, 아마 X도 마찬가지였을 것 같다. 나도 헤어짐을 고민했으니 X도 역시 같은 고민이 있었겠지. 그렇게 대망의 그 날이 왔다. 지난주까지 데이트를 하고 전날까지 연락을 주고 받았던 X는 "내일 아침에 일어나서 연락할게. 데이트하자"는 말을 끝으로 다음날 X의 연락이 없었다. 겨우 이틀이었지만 싸운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별 생각을 다 했다. 무슨 일이 난건지 걱정이 되기 했고 설마 말로만 듣던 잠수이별을 당한건가 잠을 잘 수 없었다. 


하지만 200일 동안 만난 X에 대해 내가 자세히 아는 건 많지 않았다. 모 아파트에 산다고는 했지만 그 이상 알지 못했고 부모님과 일을 하고 어떤 일인지는 알려줬지만 사무실 위치까지 알지 못했다. 친구들도 처음 술자리에서만 보고 그 뒤로 보지 못했기 때문에 가까운 사람 연락처도 몰랐다. 마치 내 인생에서 X가 증발한 것 같았다. 


처음 겪어본 지옥이었다. 전화를 하고 메시지를 보내는 방법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력감과 본인의 남자친구에 대해 이렇게도 무지하다는 것에 대한 자책감이 컸다. 자취방에 틀어박혀 애꿏은 폰만 쳐다보고 발만 동동 굴렸다. 


이틀간 잠수를 탄 X는 출근한 나에게 연락을 해 왔다. 그만하자는 메시지였다. 이렇게 카톡 이별은 할 수 없었다. 전화를 하니 X가 받았다. 개인적으로 하던 사업에 문제가 생겨서 더이상 나를 만날 수 없단다. 머리가 어지럽도록 울었다. 


X와의 연애가 끝나고 평생 이불킥할 이별 후유증을 거쳤다. X가 나와 헤어지기 위해 한 거짓말을 인정하는데 몇 달의 시간이 걸렸다. 알고는 있었지만 인정하기 싫었다. X의 사정 때문이 아니라 나와의 연애를 그냥 끝내고 싶었던 X가 비겁하게 연락두절, 카톡이별통보, 거짓이유.... 최악의 이별 쓰리콤보를 한 것이란 걸.


첫 연애가 막을 내리고 난 그 뒤로 제대로 된 연애를 하지 못했다. 호감을 갖고 다가오는 사람도 믿지 못했고 마음 잡고 연애를 시작해도 맘껏 좋아할 수 없었다. X에게 했던 것처럼 좋아한다는 말을 하지 못했다. 무려 4년간 말이다. 사실 X는 금새 잊었다. 처음 좋아해본 사람이었지만 그렇게까지 깊은 관계로 발전을 못했기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하지만 X가 마지막으로 안긴 그 고통이 4년간의 모든 이성관계를 마비시켰다. 


X로부터 시작된 방황의 끝에 지금 남자친구 B를 만났다. 5년 전의 이별 그림자를 여전히 안고 있지만 그걸 보듬어주는 사람을 만났다. 하루는 B와 그동안의 내 연애에 대해 이야기하게 됐고 B와 헤어지면 다시 방황할지도 모르겠다고 말했다. 그때 B가 말했다. 


좋은 연애를 한번 해보면 그렇지 않을거야


X와 헤어졌을때, 그 뒤로 엉망진창으로 제대로 연애를 하지 못 했을때 남들 다 하는 그저그런 연애를 난 왜 하지 못할까 고민한 적이 있었다. 투닥거리더라도 남자친구와 화해하고 풀어나가는 친구들을 보면 부러웠다. 처음으로 지금 안정적인 연애를 이어가고 있다. B의 마음을 온전히 받고 나도 마음을 쏟고 있다. B의 상처를 내가 감싸고 나의 상처를 B가 감싸주고 있다. 그렇게 평생 혼자 살거라고 했던 나는 B와 함께 미래를 꿈꾸고 있다. 몇 년 전 그때의 나처럼 고민하는 누군가에게 말해주고 싶다. 


언젠가 당신의 상처를 보듬는 순간이 올거라고.

그게 새 애인일지, 친구일지, 가족일지 모르고

혹은 나 스스로 빠져나올 수도 있을지 모르지만...

트라우마를 극복할 수 있는 돌파구를 꼭 찾을거라고.

매거진의 이전글 소나기 피해 독일로 떠난 휴직자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