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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링귄 Nov 20. 2020

고시원에 엄마가 왔다

돈 크라이 마미

서울에 혼자 사는 나와 달리 한 살 어린 여동생은 고향 집에서 부모님과 함께 거주 중이다. 그래서 종종 내가 모르는 부모님의 이야기를 동생이 들려주곤 한다. 하지만 얼마 전 동생이 들려준 이야기는 평소와 달리 가볍지 않았고 나에게 큰 충격을 줬다.


"예전에 언니가 고시원에서 잠시 살았잖아. 

엄마가 서울 갔다가 그 고시원 보고 아빠랑 술 마시다가 우시더라."




대학교를 졸업하기 전, 취업과 대학원 진학 등 여러 갈림길에 서 있을 때 임시로 거주할 목적으로 고시원을 알아봤다. 몇 개월만 묵을 곳이지만 여러 동네를 다니며 고심해서 상수동의 한 고시텔을 선택했다. 무려 월에 50만 원씩 내야 하는 고시원이었지만 감옥이 떠오르는 다른 곳에 비해 괜찮았고 무엇보다 창문이 커서 볕이 들어왔다. 


물론 고시원 생활은 힘들긴 했다. TV에서만 보던 좁은 방 한 칸에서 생활하는 건 익숙해지지 않았다. 고시원 방에 혼자 있는 게 싫어서 해가 뜨면 집 밖으로 나가 늦은 저녁이 되어서야 들어왔다. 특히 그 좁은 방에 꾸역꾸역 펼쳐진 빨래건조대를 보는 게 끔찍하게 싫었다. 침대에 앉아 창밖을 바라보는 게 유일한 낙일 정도였으니까. 밥을 냄비째 먹어도 스트레스 때문인지 살도 계속 빠졌다. 당시 20대 최저 몸무게를 아무 노력 없이 달성했다.


그때 당시 살았던 고시텔 내부. 좁긴 진짜 좁았다.


그래도 겨우 2~3달만 지내는 거라 불만 없이 살았고 다행히 곧 취업이 돼 자취방을 얻었다. 서울로 혼자 올라간 딸이 걱정되셨던지 엄마가 이사를 도와주러 오셨다. 몇 개월 만에 보는 거라 반가운 마음이 컸고 맛있게 식사를 같이한 후 짐을 옮기려고 엄마와 고시원을 들어갔는데 엄마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동안 여기서 지냈니? 너희 아빠 보셨으면 난리 났어.


그 말씀에 흠칫 놀랐다. 고시원살이가 힘들긴 했지만 그나마 괜찮은 방을 고른 것이었고 주변 친구들도 단기로 거주할 때 고시원을 많이 이용해서 엄마의 이런 반응을 예상치 못했다. 엄마는 고향 집으로 내려가실 때까지 홀로 서울살이하는 것에 대해 걱정하셨다. 그리고 5년이 지나서야 엄마가 내가 사는 방을 보고 눈물을 보이셨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부모님에게 자식이란 그런 존재인가 보다. 

나는 못 입고 못 먹고 불편해도 자식이 그런 상황에 부닥치는 게 끔찍이도 싫으신가 보다. 


부모님은 시장에서 야채를 파신다. 새벽 2시에 집을 나서서 밤새 장사를 하고 아침 10시 정도에 퇴근하신다. 오후가 되면 경매를 보러 가시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하루에 잠을 두 번 쪼개서 주무신다. 어릴 적에는 가끔 부모님 장사하는 곳을 따라가곤 했는데 말이 가게지, 창고나 다름없는 공간에서 야채를 파신다. 특히 추운 겨울날이면 아무리 껴입어도 살을 에는 칼바람이 들어와 몸을 아프게 했다. 


엉망진창인 수면 패턴, 매일 나르는 무거운 박스, 덜덜 떨어야 하는 차가운 새벽공기... 그 힘든 새벽 장사를 15년 동안 한 50대 부모님의 몸은 안 아픈 곳을 찾기 어려울 정도다. 다리가 불편하셔서 수술할 정도. 이제 겨우 여유가 생겨서 여행을 같이 가려고 해도 잠시 걷는 게 힘드시다. 


그렇게 부모님이 고생하시는 동안 우리 집 형편은 나아졌다. 어린이집을 다녔을 때는 당시 부모님이 하시던 식당에 딸린 방에서 생활을 했고 유치원생 때는 방 한 칸짜리 빌라에서 네 식구가 함께 잠을 잤다. (어릴 때라 그런지 그때의 기억은 참 따뜻하고 좋다. 부모님이랑 항상 재미있었던 기억이 난다.) 그 뒤 18평짜리 오래된 아파트로 이사해 동생과 한 방을 썼고 고등학생이 되어서야 방 3개인 집에서 내 방을 처음으로 갖게 됐다. 동생과 나도 돈 걱정 크게 한 적 없이 살았다. 물론 좋은 가방을 맨 친구들이 부럽지 않았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지만 아르바이트 한 번 해본 적 없이, 등록금 걱정 없이 자랐다. 동생과 내가 아무 걱정 없이 지금까지 살 수 있었던 건 분명 부모님의 노력이다.


본인들은 허름하고 온기 없는 가게에서 새벽을 보내면서, 방은 작지만 햇빛을 볼 수 있는 곳에서 겨우 몇 개월 지낸 큰딸을 보며 가슴 아프셨다니. 늘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살면서도 부모님께 잘해드리는 게 또 왜이리 어려운지. 좋은 딸이 되고 싶지만 한편으로는 자유롭고 싶다. 언제 나는 부모님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까. 그런 날이 올지 모르겠지만 다시 다짐한다. 


부모님 마음이 안 아프게, 행복하게 살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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