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트레스를 받으면 몸이 아픈 사람이 있다.
비교적 자궁 쪽이 건강하다고 생각했었다. 생리주기 관리 캘린더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할 정도로 주기가 잘 맞았고 그 흔한 생리통도 거의 없었다. 그러다 직장인이 되고서 완벽했던 생리주기가 삐그덕 거리기 시작했다. 일주일 넘게 늦어지는 생리기간에 별 생각 없이 친구에게 "어쩐 일로 생리를 안 한다?"고 말했다. 친구가 산부인과에 한번 가보라고 권했다. 20대 중반이 다 되도록 산부인과를 가본 적이 없었고 자주 검사를 받아야 한다는 걸 알고서 처음으로 산부인과를 갔다.
서울살이에 익숙치 않았던 당시, 병원을 미리 예약할 생각을 못 했고 생각했던 곳은 예약이 꽉 찬 상태였다. 고민하다가 옆 건물에 있던 작은 여성의원으로 들어갔다. 병원으로 가는 엘리베이터는 꽤 좁았다. 40대 정도로 보이는 한 여성 분이 함께 타셨다. 별 생각 없이 엘리베이터 문을 바라보는데 날 향한 시선이 느껴졌다. 그 시선 끝에는 함께 엘리베이터를 탄 여성 분이 있었다.
나를 위아래로 훑는 느낌. 흔히 겪어보기 힘든 시선이었다. 청치마에 가벼운 티셔츠, 그리고 에코백과 캔버스화를 신은 20대 초중반의 나를 빠르게 훑더니 말했다. "낙태?" 머리가 뎅- 하고 울렸다. 뭐라고 대답할지 몰라서 머뭇거리다가 "아니요.."라고 짧게 대답했다. (지금이었으면 무시했을텐데)
머리가 뎅- 하고 울렸다.
잠시후 그 여성 분은 나와 같은 층에서 내렸다. 그 여성의원 원장이었다. 더 충격이 컸다. 산부인과 의사인데, 같은 여자인데 산부인과를 오는 젊은 여성은 낙태를 할거라고 지레짐작한 것이니 말이다. 보수적인 50대 우리 아버지도 하지 않을 발상이었다. 아니, 실제로 그렇다 할지라도 그런 눈빛으로, 그런 태도로 상대에게 말하다니.
어버버 고민하는 사이, 얼결에 받은 진료도 수치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의사가 하는 말과 행동은 처음 산부인과를 가본 나로썬 상처가 될 요소 뿐이었다. 끝까지 의사는 나에게 실손보험을 물어보더니 이것저것 여러 진료를 권했다.
그 뒤로 몇 년간 산부인과에 가는 게 무서웠다. 생리를 10개월간 불규칙하게, 거의 안 하다시피 하는 상황인데도 용기가 나질 않았다. 바쁜 일상 속에서 잊혀진 탓도 있었다. 매일 같이 야근하고 주말 출근하고. 돈 몇 푼 벌어보겠다고 내 몸을 돌보지 않았다.
몇 년간 산부인과에 가는 게 무서웠다.
10개월의 시간이 흐르자 그때서야 심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 이상 아무 병원이나 갈 수 없었다. 아이 엄마처럼 위장해 지역 맘 카페에 가입했고 거기서 추천 받은 병원을 갔다. 그곳은 아무도 날 이상한 시선으로 보지 않았다. 감기 때문에 내과에 방문한 것처럼 어떠한 감정이 들지 않았다. 이후로도 마찬가지다. 지금은 자주 산부인과를 방문하는 편인데 그때의 수치심을 느낄 일은 없었다. 왜 하필 처음 갔던 곳에서...
지금 돌이켜보면 멍청한 건 나였다. 낙태? 라고 말했을때 왜 무시하거나 버럭 화를 내지 않았을까. 그런 의사인 걸 알았을때 왜 뒤돌아 나오지 않았을까. 생리불순이 있을때 왜 빨리 병원을 가지 않았을까. 지금도 후회한다.
친구가 나에게 이런 말을 했다. 산부인과는 여의사가 봐줬으면 좋겠다고.
난 말했다. 좋은 의사, 나쁜 의사는 성별을 안 가린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