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만간 할 수 있다면
코로나 이후 늘 붐비던 국제선은 적막이 흐르고 인스타그램에 도배되던 해외여행 사진은 찾아보기 힘들다. 몇 년 전에 찍었던 사진을 추억하며 올리는 게시글이 전부다. 동남아 특유의 내리쬐는 햇볕을 받아본 때가 언제인지 모르겠다. 유럽 갈 때 그토록 지겨웠던 비행시간마저 그립다는 사람도 속속 생기고 있다. 운 좋게도 코로나가 터지기 직전인 19년도 12월, 이탈리아 여행을 다녀왔다. 운이 좋은 건 틀림 없었지만 아쉬움도 컸던 여행이다.
그게 마지막 여행인 줄 알았더라면...
그해 10월, 내 생애 처음으로 퇴사를 했다. 소속이 없어지고 소득이 없어진다는 불안감과 함께, 간절했던 휴식이 기다린다는 설렘이 공존했다. 회사를 그만두면 하고 싶었던 일 중에 하나가 유럽여행이었다. 긴 휴가기간이 주어지지 않으면 갈 수 없는 그곳, 유럽. 유럽에 가고 싶었다. 유럽 땅을 밟기 위해서는 10시간이 훌쩍 넘는 비행시간을 견뎌야 하지만, 그 또한 쉬는 자만이 누릴 수 있는 불평이다. 넉넉하지 않지만 4년간 일해서 받은 퇴직금도 있겠다, 시간도 생겼겠다, 유럽여행을 계획하는데 문제가 있었다. 여행 메이트가 없는 것! 혼자서 유럽여행을 많이 가던데... 해외여행은 혼자 가본 적이 없어서 엄두가 안 났다.
결국, 패키지 여행을 결심했다. 일차적으로 안전하다는 장점이 컸다. 부모님도 혼자 유럽여행을 간다고 하니 걱정이 크셨고 나 역시 해외에 덜컥 혼자 가려니 겁이 났다. 게다가 코타키나발루 여행 때 패키지로 가본 경험이 좋았다. 인터넷에서 본 후기와 달리 자유롭게 시간을 쓸 수 있었다. 정말 숙소와 여행지를 이동시켜주고 간단히 안전사항을 전해주는 패키지여행이었다. 그렇게 일주일간 이탈리아를 여행하는 패키지로 파워결제했다. (드디어 내 퇴직금을...!!!)
유럽 패키지여행에서 가장 기대했던 건 다름 아닌 새로운 사람들이었다. 이미 절친 둘은 각자 혼자 유럽 패키지여행을 다녀온 경험이 있었다. 둘 다 그곳에서 만난 언니들과 지금까지도 연락을 주고 받을만큼 친해졌고 특히 한 친구는 그 언니와 서울에서 룸메이트를 할 만큼 가까워지기도 했다. 새로운 사람을 여행에서 만나는경험이라니! 영화 <비포선라이즈>처럼 남녀간의 사랑이 아닐지라도 낭만적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여행사에서 함께 방을 쓸 사람을 연결시켜주는 룸 쉐어 서비스를 신청했다. 혼자 너른 방을 쓰는 것보다 돈을 절약할 수도 있었고 새로운 사람과 추억을 쌓는 것도 좋을 것 같았다.
설렘을 가득 안고 유럽 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그때까지는 같은 패키지 여행객을 모르는 상황이라 아무 자리나 앉았는데 옆좌석에 무서운 인상의 아저씨가 계셨다. 어차피 대화할 건 아니지만 열 몇 시간을 옆에 있다보니 신경이 쓰이긴 했다. 그러다가 예상치 않게 그 아저씨와 대화를 하게 됐다. (어쩌다가 대화를 시작하게 된지 기억이 안 난다. 아마 아저씨의 매서운 인상 때문에 얌전히 있었으니까 아저씨가 먼저 말을 걸었을거라고 생각한다.) 가장 첫 대화주제는 당연히 여행지였고 아저씨는 출장길이셨다. 대화를 하는데 이렇게 흥미로울수가ㅋㅋ 모 광고 에이전시 대표로 해외 출장 중인 아저씨와 홍보 에이전시를 다니다 처음으로 사표를 쓰고 여행을 온 사회초년생의 대화. 할 얘기가 없을 것 같지만 서로 모르는 사이라서 할 수 있는 여러 이야기들을 비행시간 내내 주고 받았다. 기내식을 좀 나눠 먹기도 하고.
그래, 역시 혼자 여행을 오면 이렇게 새로운 사람과 대화하는 재미지!
기대한대로 패키지 여행객들은 여행 오게 된 스토리도 다 달랐고 연령대도 다 달랐다. 먼저 나와 같이 방을 쉐어하게 된 언니는 회사원으로, 휴가를 받았는데 친구들과 시간이 맞지 않아서 혼자 여행길에 올랐다고 했다. 조용한 성격이었지만 얘기할수록 좋은 사람이었다. 여행기간 내내 붙어다니며 서로 사진도 찍어주고 쉴새 없이 수다를 떨었다.
조식 테이블에서 친해진 모녀도 있었다. 정말 동안이셔서 고등학생인가 했더니 나보다도 나이가 많은 언니가 엄마와 함께 여행을 왔다고 했다. 딸과 친구처럼 지내셔서 보기 좋았던 아주머니는 유쾌하셨다. 여행 내내 분위기 메이커 역할을 하셨다. 혼자 여행오신 할아버지도 계셨다. 예전부터 혼자 여행하는 걸 즐기셨다고 했다. 우리들이 화장품 가게에서 쇼핑을 하는데 슬쩍 오시더니 "어떤 색깔이 이쁜가요?"라며 립스틱 컬러를 물으셨다. 와이프 분과 딸, 며느리에게 선물할 립스틱을 골라드렸다.
손주들과 여행 오신 노부부도 있었다. 아들네가 효도여행 겸 손주들과 시간을 보내시라고 이탈리아 패키지 티켓을 끊어줬다고 했다. 손주들이 여행 중에 폐라도 끼칠까 걱정하시고, 음식이 맛 없었으면 굶을까봐 간식을 사주시고, 갖고 싶다는 장난감도 손에 쥐어주셨다. 피곤하셨을지도 모르겠지만 내 눈에는 좋은 그림이었다. 할아버지, 할머니와 함께 여행을 다니기 쉽지 않다는 걸 알기 때문에. 할아버지와 할머니, 그리고 손주들에게도 따뜻한 여행이었을거다. 그 밖에도 우정여행을 온 수능 끝난 고3 학생들, 거동이 다소 불편하신 어머님을 모시고 오신 분 등 다양한 분들과 함께 해서 더 색다르게 느껴진 여행이었다.
그럼에도, 패키지 여행을 더이상 하고 싶지 않다.
문제는 패키지 여행방식이었다. 일주일간 이탈리아 북부부터 남부까지 돌아다닌다는 말에 의문을 품었어야 했다. 이탈리아가 이렇게 큰 나라일 줄이야. 아침 6~7시에 조식을 먹고 움직여야 했고 밤 9시가 넘어서야 숙소로 돌아왔다. 일주일 내내! 20대인 나도 여행하는 동안 피곤했다. 연세 많으신 분들도 계셨는데 나만 피곤하나 싶었다. 고3 친구들 얼굴도 피곤해보였는데 기분 탓인가. 그렇게 타이트한 일정을 소화하는데도 기억에 남는 곳은 많지 않았다. 진득하게 구경한 곳이 거의 없었다. '이탈리아를 훑었다'라는 말이 어울렸다. 그나마 로마를 갔을때 선택형 일정을 결제하지 않은 나를 칭찬한다. 로마의 주요 관광지 몇 곳을 포기하긴 했지만 젤라또 하나를 들고 로마 시내를 걸어다니고 피노키오 인형탈을 쓴 분과 사진을 찍는 등 더 의미 있고 기억에 남는 시간을 보냈기 때문이었다. 밀라노와 소렌토를 일주일만에 본다는 건 잘못됐다.
또! 숙소는 어차피 잠만 잤으니 상관 없는데 식사가 별로였다. 코타키나발루도 음식이 좋았던 건 아니지만 이탈리아는 좀 많이 심각했다. 이탈리아 음식이 생각보다 별로였다는 지인의 말이 있어서 원래 이런건가 했지만 나중에 다른 식당에서 따로 식사를 했는데 기대 이상으로 맛있었다.
덕분에 내 여행 스타일을 처음으로 깨달았다. 가장 좋았던 여행은 일주일 동안 프랑크푸르트 근교여행을 했던 것만 봐도 여유롭게 한 도시와 그 일대를 즐기는 게 내가 선호하는 여행인 듯 하다. 여행을 열심히 다닌다고 했지만 이제서야 알게 된 여행 타입. 그리고 코로나19가 터졌다.
언제 다시 여행 갈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