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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링귄 Dec 09. 2020

어릴적 꿈과 다르게 자랐지만 괜찮아

영화 <써니>의 친구들처럼.

부모님의 성화에 못 이겨 간만에 본가로 내려갈 채비를 했지만 왕복 비행기를 끊고 며칠 뒤 취소해 버렸다. 갑자기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이 재확산되면서 서로의 안전을 위해 일정을 미룬 것. 이미 결재 올린 연차를 취소하기도 애매해서 고향 친구 H에게 연락을 했다.


"우리 언택트 티 타임 할래?"


내 제안에 꺄르르 웃던 H는 커피와 귤을 준비하고, 나도 집 앞에 있는 카페에서 아이스 라떼 한 잔을 테이크아웃해서 카카오톡 페이스톡을 켰다. 처음에 너무 어색했다. 노트북 모니터라 생소한 게 아니었다. 얼굴을 보고 수다를 떤지 너무 오래된 탓이었다.




중학생 때부터 알고 지냈던 H는 어느덧 두 아이의 엄마가 되어 있었다. 큰 아들이 내년이면 초등학교에 입학을 한다고 했다. 어린 아들과 딸이 유치원에 가고 생긴 소중한 시간이라고 했다. 조금은 이른 나이에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은 H는 나와는 다른 세상에 있었다. 아이들 교육 걱정부터 출산 이후 느낀 몸의 변화, 시월드에 대한 어려움 등을 이야기하는 모습이 낯설기만 했다.


문득 H의 결혼 소식을 들었을 때가 떠올랐다. 타지에 있는 대학교를 간 나는 재학시절 고향 친구들에게 연락을 자주 하지 못했다. 학교생활과 타지생활을 적응하는데 모든 에너지를 쏟았고 특히 학교 행사나 과제에 매달려서 고향에 내려가는 일도 적었다. 한창 학교 행사 준비로 바쁘던 어느 날, H의 결혼소식을 들었다. 연애도 못 하고 있던 나에게 결혼이란 단어가 와닿지도 않았다.


그렇게 또 다시  몇 년이 흘러 H에게 연락을 하게 됐다. 서로 뭐 하고 지내냐는 근황 토크를 했다. 그새 H는 둘째 아이를 낳았고 나는 회사원이 되어 있었다. 중간에 한번 얼굴을 보긴 했지만 애기들이 어려서 H와 장시간 이야기 할 수 없었고 드문드문 연락을 하며 지금까지 지냈다.


그렇게 제대로 얼굴을 못 본 기간이 거의 10년이 됐다. 그것도 모니터를 통해서. 어느 정도 아이들이 크고 나니 친구와 시간을 보낼 여유가 생겼다는 H의 말에서 몇 년간 얼마나 마음고생한지 느껴졌다.


얼굴은 그대로였다. 아이들이 없는 몇 시간 동안 통화하는데 순간 순간 15살 때의 모습이 겹쳐 보이기도 했다. 중학생인데도 키 크고 예쁘고 성격까지 좋았던 H는 여전히 예쁘고 유쾌했다. 오후에 유치원을 다녀온 아이들이 와글와글 시끄럽게 들어오고 나에게 "이모"라고 말하는 장면에서 H는 정말 엄마가 된 게 맞구나라고 실감했다.




10대의 H가 그렸던 28살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중학생 때 나는 선생님을 꿈 꿨다. 문학을 가장 좋아해서 지금쯤 나이에 국어 교사가 되어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고2 때 잠시 방황하면서 교사의 꿈을 접고 다소 충동적으로 광고홍보학을 선택하게 됐다. 28살의 난 현재 5년차 직장인이 되었다. 그것도 부모님의 품을 떠나 서울에서 홀로 오피스텔에서 살며.


서른이 될 쯤엔 외제차는 아니더라도 내 명의의 차를 몰고, 전세금을 모을 만큼 돈을 벌었을 거라고 생각했다. 또 드라마 속에 나오는 커리어 우먼처럼 똑 부러지게 말도 잘하고 화려하게 꾸미고 다닐 줄 알았다. 현실은 장롱면허에다 전세 보증금은 부모님께 빌려야 했고(10년 새 물가가 많이 뛴 탓도 있다) 여전히 꾸미는 게 서툴기만 하다.


영화 <써니>가 떠올랐다. 영화 속 주인공들처럼 친구들과 함께 H의 집에 모여서 놀곤 했다. 단체로 춤을 춰서 영상으로 남기기도 하고 뮤직비디오를 패러디하거나 웹소설을 쓰기도 했다. 함께 어울리던 친구 모두 10년 만에 다른 모습으로 살고 있다. 영화 <써니>의 7공주 멤버들처럼. 


나도 역사가 있는 내 인생의 주인공이야.


영화 <써니>의 명대사 중 하나다. 우린 모두 예상하고 계획했던 대로 살아가고 있지 않다. 매순간 선택을 하며 지금까지 왔다. 그래서 다 다르게 살고 있다. 가끔은 서로의 선택이 더 재미있고 값져 보이기도 한다.


H는 아이들을 키우다 문득 정신 차리니 자신의 20대가 사라졌다며 아쉬워 했다. 하지만 H도 안다. H가 일찍이 결혼을 한 것을 보며 주변의 아기 엄마들이 부러워 한다는 걸. 나도 학생 때 아르바이트를 해볼걸, 대학교 졸업하고서 찬찬히 직업 고민을 해볼걸 등등 아쉽다고 느끼는 선택들이 있다. 하지만 나도 그 선택 덕에 지금의 연차를 쌓고 저축을 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H와의 통화를 끝내고서 잠시 생각에 잠겼다. 분명 나와 H는 다른 삶을 살고 있다. 하지만 10년만의 대화가 끊이지 않고 오히려 통했다. 그제서야 왜 어른들이 힘들 때 고향친구에게 연락하는지 알 것도 같았다.


학창시절 친구들이야말로 서로의 진짜 웃음을 기억해주고 있다. 미워하고 경쟁할 필요 없던 그때, 사회생활에 찌들지 않고 육아에 지치지 않은, 앳띤 얼굴을 말이다. 그리고 그때의 마음을 잠시 잊고 지낼 만큼 각자의 삶에서 치열하게 살았다는 사실도 서로에게 위안이 되었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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