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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링귄 Nov 27. 2020

영화 <어바웃 타임>처럼 시간을 돌릴 수만 있다면

내가 사랑했던 친구에게

많은 사람이 인생 영화로 꼽는 영화 <어바웃 타임>은 로맨스 영화지만 연애감정 외에도 다양한 걸 깨닫게 한다. <어바웃 타임>을 보고나면 스스로 하게 되는 질문이 하나 있기 때문일 것. 


과거로 시간을 돌릴 수 있다면, 


그 질문을 던지는 순간 그간 자신이 살아온 인생 전반을 쭉 훑게 된다. 이불킥 하게 만드는 부끄러운 순간, 참았으면 더 좋은 상황이 벌어졌을 것 같은 순간, 반대로 행동해야만 했는데 못한 순간 등 '그때 그렇게 할걸'이라고 후회하는 순간들이 필름처럼 펼쳐진다. 그리고 그중에서 고민 없이 번복하고 싶은 하나의 선택이 있다.




PR 대행사에서 막 대리를 달고 한창 다니고 있을 무렵이었다. 가장 절친이었던 친구 J가 물었다. "너희 회사에 지원해볼까? 어때?" 당시 J는 대학교 졸업을 한 상태에서 취직 때문에 고민이 많은 시기였다. 특히나 집이 지방인데 무직 상태로 서울에서 지내는 게 부담이 컸다. 그래서 회사에서 서류작업을 도와줄 알바생을 구할 때 J를 소개했고 몇 달간 그 회사에서 무탈하게 업무를 마쳤다. 아마도 아무런 정보가 없는 회사보다 이미 분위기를 알 수 있는, 그리고 친구가 몇 년씩 다닌 회사를 선택하는 게 낫겠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우리 회사... 어떻지? 일은 엄청 많고 힘들긴 하지만 신입이니까 일 배운다고 생각하면 나쁘지 않은 것 같고, 월급은 쥐꼬리지만 월급 밀릴 걱정은 전혀 없는 곳이고, 전체적으로 연령대는 높으나 사람들이 비상식적이지도 않고. 일단 내가 다니고 있는 회사인데 치명적인 결함을 찾기란 어려웠다. 치명적인 결함을 발견했다면 나도 그만뒀겠지. 그래서 면접이라도 한번 보라고 권했다.


그러고 며칠 후, 직장 상사와 외근 가는 길.

"전에 알바로 일했던 김 대리 친구가 신입으로 지원했던데 서로 안 불편하겠어? 알바할 때 그 친구 좋게 보긴 했는데 심지어 면접을 정말 잘 봤어. 그래서 입사시킬까 했는데 김 대리랑 친구가 서로 일하는 게 불편하지 않을까 싶어서."


어른들은 모두 나에게 걱정의 말을 건넸다. 친구랑 같이 일하면 사이가 틀어질 수도 있다며. 친구에게 선배님이라고 해야 하는 상황이고, 일하다가 문제 생기면 혼도 내야 하는데 그게 친구면 분명 기분 상하는 일이 생길 수 있다고. 하지만 그 말이 들어오지 않았다. J와는 공모전이나 동아리 운영 등 여러 활동을 함께 한 경험이 있고 그때 항상 문제 없이 잘 끝냈기 때문에 서로 공사는 구분할 거라 생각했다. 더욱이 회사에서도 되도록 같은 본부에 배치하지 않겠다고 했고 J의 입사가 결정됐다.


늘 그렇듯 인생은 예상처럼 흘러가지 않는다. 마침 그때 타 본부의 신입사원 T.O가 다 차버렸고 회사 입장에서는 어쩔 수 없이 신입 배치를 못 시킨 우리 본부로 J를 입사시킬 수 밖에 없었다. 본부의 막내가 된 J, 수습기간 3개월 때문에 집을 구하기 애매했고 내친 김에 회사 가까이 있는 우리집에서 몇 달 지내기로 했다. 


시간을 돌리고 싶은 순간. 나도 이런 능력이 있다면.


그게 불행을 앞당기는 도화선이 될 거라곤 전혀 알지 못했다.


처음에는 정말 좋았다. 업무를 익히는 중인 J에게 몇 가지 팁을 알려줬고 내가 평소 업무량이 많은 것을 아는 J도 나에게 도울 것이 있냐고 물어봐 줬다. 게다가 J 위에는 사원인 선배가 있었기 때문에 직접적으로 내가 J에게 이래라저래라 할 필요가 없었고 둘 다 아는 이야기가 늘면서 퇴근 후 집에서 폭풍 수다를 떨었다. 다행히 J는 업무를 곧 잘 따라왔고 회사 분들이 나에게 J 칭찬을 할 정도로 평이 좋았다. 


그때까지만 해도 회사에 친한 동갑 직장동료가 생긴 것 자체도 좋았다. 비교적 어린 나이에 입사하면서 그동안 동기는 물론이고 후배들도 모두 나이가 많았고 그나마 비슷한 또래가 입사하더라도 회사 분위기도 기수 문화가 강해서 기수 차이가 많이 나는 후배랑 가까워지는게 어려웠다. 자연스레 비슷한 직급의 언니, 오빠들과 몇 년간 어울려서 회사를 다녔다. 


하지만 직장동료에서 시간이 흘러 친구 사이로 변할 수 있어도, 

친구 둘이 온전히 직장동료가 되기란 매우 어렵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밖에 없었다.


업무 특성 상 외근이 잦았고 그날도 현장에서 정신 없이 바쁜 상황이었다. 보통 사무실 내부에서 현장을 지원해 주는 형식인데 마침 J가 내근 중이었고 전화로 J에게 업무지시를 했다. 나중에서야 그 통화로 인해 J의 기분이 상했다는 걸 알게 됐다. 이유는 그날 본인이 지시사항을 알아 듣지 못하자 내가 작게 한숨을 쉬었다고 한다. 정말 기억이 나지 않았다. 스스로 변을 하자면, 그 사람이 많아서 시끄럽고 복잡한 현장에서 클라이언트 앞에서 일해야 했던 나는 나도 모르게 매우 예민한 상태였나 보다.


J는 내심 나를 대리님으로 부르는 게 불편해 했다. 입사 전엔 상관 없다고 했지만 역시 친구를 선배로 두는 게 쉽지 않았던 것 같다. J는 동기들 앞에서 내 이야기를 했고 그 이야기 중 일부는 날 웃음거리 소재로 쓰는 것처럼 들렸다. 결정적으로 회사 대표님과 J의 면담시간이 J의 자존심을 건드렸다. 대표님은 학생이던 내가 입사하고 잘 적응했다, 어느덧 회사에서 큰 프로젝트도 척척 하고 있다, J도 열심히 하길 바란다며 날 칭찬하는 말을 많이 했다. 사실 그건 대표님의 평소 면담 스타일과도 같았다. 그 직원에 대해 알고 있는 정보를 활용해서 듣기 좋은 말씀을 해주시고 직원에게 격려하는 식. 그런데 대표님의 면담은 J의 기분을 상하게 했다. 


Unsplash에서 찾은 사진. 차라리 화끈하게 싸울 걸 그랬나.


그 뒤로 부딪히는 것들이 많았다. 가장 크게 부딪히는 부분은 감정을 표출하는 방식에 있었다. J는 평소에 온화한 편이다. 커피와 책을 좋아하고 나서는 걸 좋아하지 않지만 공감을 잘 해줘서 주변에 깊게 친한 친구가 많았다. 하지만 의외로 불 같은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직장인이 되니 회사나 직장 상사에 대한 불만이 생겼는데 퇴근 후 집으로 돌아와 나에게 다다다 쏟아내곤 했다. 처음엔 그런 J가 안쓰러워서 곧이곧대로 다 들어줬다. 나 역시 막내생활 하면서 정말 힘들었으니까. 


문제는 J가 불평을 쏟아내서 힐링을 하는 동안 내가 힘들었다는 것이다. J와 반대로 나는 평소 발랄한 이미지에 비교적 나서는 스타일이다. 전형적으로 외향적인 성격이라 주변에 사람이 많지만 깊게 알고 지내는 친구는 소수다. 그리고 불만이 있어도 참는 타입이다. 내가 불평을 쏟아내는 건 단 하나의 이유다. 정말 그 사람을 안 볼 생각으로, 회사를 안 다닐 생각으로. 그래서 부정적인 생각이 드는 걸 눌러담고 되도록이면 꺼내지 않으려는 편이다. 대신 스트레스가 있는 상황에서 벗어나면 잠깐 잊는 단순함을 가지고 있다. 


이런 성격의 나에게 퇴근 후 J의 불평불만 스토리는 내 마음에 생채기를 냈다. J의 일이 곧 나의 일이었기 때문이다. J가 싫은 부분을 더 오래 다닌 내가 모르기 어렵다. 나도 알지만 그냥 참고 다니고 있는 것. J가 입으로 그 사실을 말하는 순간 눌러 담는 게 어려웠다. 심지어 스트레스 대상인 회사에서 벗어났는데 집에서도 회사 얘기를 해야 하다니...!! 말하면 풀리는 J와 달리 나는 수면 위로 스트레스가 올라왔고 억지로 마주보게 했다. 결국 한 마디 했다. "그만 말해." 그 말에 J도 상처를 받았다. 그도 그럴게 좀 더 어른스럽게 차분하게 말해도 좋았을텐데 순간을 못 참고 그런 식으로 말했으니 더 충격적이었겠지. 


어바웃 타임 한 장면. 엉망진창이라도 J와 즐거웠던 때가 있었는데.


그 뒤로도 회사생활 중에 서운한 일, 평소에 마음에 안 들었던 일 등 다툼을 하며 저녁을 먹는 날이 늘었다. 6년이 넘도록 친했지만 그동안 단 한번도 싸운 적이 없었는데 다퉈보니 싸우는 스타일도 완전 달랐다. 


나는 부글부글 끓는 상황이 벌어지면 잠시 피했다가 생각을 좀 하고 다시 정리해 '이런 부분이 너무 서운해'라고 말하는 편이다. 싸우는 상황에서 무언가 말을 하고 싶어도 워딩이 공격적일 수 있다고 생각하면 되도록 입을 다물고 아무말도 하지 않는 습관도 있다. J는 반대였다. 평소 친하게 지내는 여동생과도 치고 박고 싸울 정도로 화끈하게 싸우고 훌훌 털어버리는 타입이었다. 싸울 때조차도 다 쏟아내야만 하는 스타일. 


두 상극이 만나니 대환장 파티가 열렸다. 내가 고민 끝에 하고 싶은 말을 꺼내면 J는 앞뒤 없이 달려 들었다. 정이 없다, 남을 생각하지 않는다, 재수없다 등 눈이 뒤집힌 것처럼 오로지 상처를 입히기 위한 말을 했다. 여기서 나는 입을 꾹 닫고 만다. 늘 그랬듯. 그럼 J는 매우 답답해 했다. "무슨 말이라도 해." 무슨 말을 할지 모르겠다. 서로의 의견 차이가 너무 큰 상황에서 말을 하면 상대방이 들어주나? 그렇게 생각하고 또 입을 다문다. 그게 매일 반복됐고 특히 술이라도 마시면서 얘기하면 더 크게 싸웠다.


계속 회사에서 봐야 하는데 직장 동료들에게 '우리 싸웠어요'라고 티내는 게 이상하다고 생각해서 J에게 평소처럼 대했다. 하지만 그것도 J의 가치관에 어긋났던 모양이다. 


J : 너 왜 회사에서 친한 척 하니?
나 : 그렇다고 회사에서 개인적으로 싸운 티 낼 필욘 없잖아.
J : 남 시선이 더 중요해? 너 그러는 거 소름 끼쳐.


점점 더 갈등이 심해지자 중간에 있던 친구들도 중재에 나섰다. 둘 다 잘한 것 없으니 친구들도 좋게 좋게 마무리되길 기다리고 조언했다. 아무리 모두가 노력하고 심지어 당사자가 노력해도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결국 J는 우리집에서 나와 새 보금자리를 얻었다. 


그 사이 나는 힘든 시기를 겪고 있었다. 회사 구조 상 대리, 과장급에게 업무가 몰려 있었고 책임까지 요구되는 상황이 벌어지며 하루하루가 버티기 힘들었다. 매일 회사에서 사투를 벌이며 J와의 일을 잠시 뒤로 미뤄두고 있던 어느 날 다른 직원에게 J의 퇴사 소식을 전해 들었다. J는 업무량이 많고 위계질서가 강한 그곳에서 적응을 하지 못했고 이 같은 결정을 내린 것 같았다. 


J가 퇴사를 하고 나면 정말 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고민을 하다가 퇴사하는 날 장문의 카톡을 보냈다. 내 나름 용기를 내서 한 행동이었고 인생사 돌고 돌다 보면 언제나 마주칠 수도 있는데 꽤 긴 시간 잘 지내왔던 친구와 마지막까지 나쁘게 끝내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J는 답변을 주지 않았다. 싸울 때 내가 했던 것처럼 입을 꾹 닫아버렸다. 




20대 초중반 행복했던 시간 속에 있던 J는 더이상 없다. 다른 사람의 입을 통해 간간히 들려오는 J의 소식만이 있을 뿐. J와의 갈등이 심했을 때는 소중한 사람을 잃는 것이 두려워 벌벌 떨었는데 막상 J가 없는 동안 행복한 추억도 쌓고 또다른 소중한 사람도 생겼다. 그리고 돌이켜 생각하면 성격이 참 다른 J와 언젠가 부딪혔을 것이고 그게 입사로 인해 빨라진 것 뿐인가 싶다. 


그 시절 내가 가족처럼 의지하고 남자친구보다도 사랑했던 친구 J...  나의 서툴고 반짝이는 어린 날 함께 해준 J... 나에게 <어바웃 타임> 주인공처럼 시간을 되돌릴 수 있는 능력이 있다면, 그래서 J의 입사를 막았으면 지금 내 곁에 J가 있을까. 아니면 내가 조금 더 참고 양보했다면 관계가 달라졌을까. J를 얻는 대신 지금 나를 사랑해주는 친구들을 잃게 되는 걸까. 가끔 J를 떠올리며 여러가지 시뮬레이션을 돌려본다. 


지금도 후회만 할 뿐 연락할 용기가 없는 겁쟁이다.
J와의 관계도, 현실도 그대로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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