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 일 없는 하루가 이렇게 고마울 줄이야
이혼을 결심하고 아이들과 새로운 집으로 옮긴 지 며칠이 지났다.
아직 집 안 곳곳은 낯설지만
아침마다 해가 들어오는 창문 앞에 서면 조금은 안도감이 든다.
이곳에서 다시 하루를 시작할 수 있다는 사실 하나로도 마음이 놓인다.
햇살 아래 뛰어가는 아이의 뒷모습을 보면
내가 두려움 속에서도 이 길을 선택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교사로서의 일상은 그대로 이어졌다.
아이들이 밝게 인사하며 내 품으로 달려올 때마다
나는 다시 마음을 세운다.
누군가의 일상을 지켜주는 일이 이렇게 큰 힘이 될 줄 몰랐다.
퇴근 후 집으로 돌아오면 조용한 집 안에 커튼 사이로 들어오는 불빛이 반갑다.
텅 빈 공간을 조금씩 채워갔다.
아이들이 좋아하는 책장 안에는 가장 먼저 책을 넣었다.
색연필과 크레파스 그림책이 가지런히 놓인
그 작은 구석이 집 안에서 제일 먼저 온기가 스며든 자리였다.
아이들이 그 앞에 앉아 책장을 넘기며 웃을 때면
이곳이 더 이상 ‘피난처’가 아니라
우리의 새로운 이야기가 시작되는 집이라는 걸 느낀다.
예전엔 늘 잘해야 한다는 부담 속에 살았다.
좋은 엄마, 성실한 교사, 책임감 있는 사람.
그 모든 역할을 완벽히 해내야만
내 존재가 의미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지금은 안다.
무너지지 않고 하루를 성실히 살아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는 걸.
아이들을 돌보는 일을 하며 배운 게 있다면
사람의 마음은 아주 작은 온기 하나로도 다시 일어선다는 것이다.
나는 그 온기를 다시 믿기로 했다.
내가 돌보는 아이들처럼 나 자신도 천천히 다시 자라 가고 있다.
하늘을 올려다보면 그저 숨 쉬고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감사하다.
아무 일 없는 하루가 이렇게 고마울 줄이야.
평범하게 출근하고 아이들을 만나고
퇴근 후 집으로 돌아와 커피 한 잔을 마시는 하루.
이제는 그 모든 순간이 내 삶을 다시 세우는 가장 단단한 기적이다.
이제 숨을 고르고 나면 다시 걸어야 했다.
아이들과 함께 그리고 나 자신과 함께.
아무 일 없는 하루의 고마움 속에서도
여전히 나는 ‘살아가는 법’을 배우고 있다.
내일도 그렇게
조금 더 단단하게 걸어가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