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르스콘(바르스쿤)은 휴대전화가 안 된다. 한국에서 기껏 로밍을 해 왔는데 소용이 없다. 숙소에서 제공하는 와이파이는 잘 터진다. 선진국인 일본에도 핸드폰이 안 터지는 지역이 있기는 했지만 드문드문이었지 넓은 지역 전체에서 휴대전화가 안 되는 경우는 없었는데, 정말 예상 못 했던 상황이었다.
핸드폰이 안 된다는 것은 나처럼 중요한 전화를 받을 일이 많은 사람한테는 치명적이다. 하는 업무에 따라 다르겠지만 한국에서 걸려오는 전화를 꼭 받아야 하는 상황이라면 여기는 로밍을 해도 소용없다는 점을 생각해야 한다.
아침부터 등산을 했다. 바르스콘 폭포를 간다고 하는데 길이 상당히 가파르다. 몇 번이고 포기하려고 했으나 결국 거의 탈진 상태에서 돌아왔다. 나이와 운동부족은 어쩔 수 없는 것 같다. 덕분에 이후 일정에서도 좀 피곤했으니 컨디션 조절을 잘해야 한다.
고생한 것에 비해 대담스레 볼 건 없다는 건 함정.
아침을 먹고 버스를 타고 아라벨 고원으로 갔다.
비포장도로라 덜컹덜컹하는데, 산악도로라 커브가 심하다. 우리 버스 기사는 상당한 베테랑이라서 과속도 안 하고 그렇다고 너무 천천히도 가지 않으면서 부드럽게 잘 넘어갔다.
설산이 점점 가까이 보이고 황량하면서도 웅장한 고산의 자태가 절로 감탄이 나오게 한다. 비포장 길을 차로 달리니 차를 열심히 세차해도 금세 더러워지는 건 아쉬웠다.
중간에 여기가 해발 몇 미터라는 표지가 있었는데, 마지막으로 본 것은 3,819m였다. 그 후로도 더 올라갔으니 대충 3,800~4,000m 정도의 지역인 것이다.
한국은 지금 폭염으로 난리인데 여긴 추워서 감기를 걱정할 지경이다. 7월 말 8월 초인데 잘 때는 전기장판이 필요하고 나와서는 한낮에도 패딩이 생각난다.
하늘이 손에 닿을 듯 가까운 이 고원에 또 넓은 호수가 있고, 작은 호수와 연못, 습지가 널려 있다.
호수를 구경하려고 버스에서 내렸더니 한 백인 여성이 뭐라고 뭐라고 한다. 러시아어라서 하나도 못 알아듣겠다. 가이드가 통역해 줬는데 흙이 많이 젖어있으니 진흙탕에 빠질 수 있어 조심하라는 것이란다. 친절한 사람이었다.
키르기스스탄 여행이 어려운 점 중 하나가 영어가 안 통한다는 것이다. 물론 일본이나 중국에서도 영어가 잘 안 통하지만 기초 단어로 의사소통은 가능한데, 여기는 전혀 안 된다. 번역 앱을 쓰려고 해도 휴대폰이 안 터진다. 이렇게 관광이 어려운 점 역시 키르기스스탄을 여행 오는 이유 중 하나이지만 불편한 건 불편하다.
아라벨 고원을 다녀오니 점심때가 되었다. 올라갈 때 두어 시간, 내려올 때는 한 시간 정도 걸렸으니 막상 내려서 땅을 밟은 시간은 얼마 안 되는 것이다. 키르기스스탄 여행이 다 대충 이렇다.
점심을 먹고 있는 사이 비가 내렸다. 아라벨 고원을 길 때만 비가 안 왔으니 어찌 보면 날씨 운이 참 좋은 것이다. 원래는 이식쿨 호수에 가서 수영도 하고 숙소 앞 산에 등산도 계획되어 있었는데 모두 취소되었다. 사실 패키지여행으로 온 분들이 나이대가 좀 있어서 다들 내심 반가워했다.
첫날 비행기도 자정에 도착했고, 몇 시간 자지도 못하고 일어나 버스로 또 몇 시간을 이동한 데다가, 아침부터 등산으로 고생했으니 나도 오후엔 좀 쉬고 싶었다.
숙소 텐트로 돌아와 침대에 누웠더니 비가 제법 많이 내렸다. 턱시도 고양이 한 마리가 제 집인 양 우리 텐트로 들어와 자리를 잡았다. 그러더니 내 배 위로 올라와 가르랑거렸다.
뭔가 먹이를 주고 싶은데 짠 음식들이라 고민을 하다가 그나마 염분이 적어 보이는 쿠키를 조금 부숴서 줬더니 한 번 맛만 보고 탁 뱉어버렸다. 그릇에 물을 부어줬더니 물도 안 마셨다.
얘는 우리가 이 숙소에서 2박을 하고 떠날 때까지 계속 있었는데 가끔 들락날락하는 걸 보니 먹이 주는 데가 따로 있는 것 같았다.
잠깐 눈을 붙이고 일어났더니 언제 비가 왔냐는 듯 맑은 하늘이었다. 가볍게 숙소 앞 개울만 갔다 오려고 나갔는데 숙소에 있던 다른 분들도 슬슬 나와 앞동산을 올라갔다. 여기까지 왔으니 그냥 보내기엔 시간이 아까운 것이다.
유명하지 않은 동네 뒷동산인데 풍경이 동화 속 마을 같다. 휴대전화만 터지면 참 좋을 것 같은데 그러면 또 관광지로 개발되어 지금과 같은 모습이 변질되지 않을까 싶긴 하다. 뭐가 좋은지는 잘 모르겠다. 적당히 편의성은 있으면서도 관광객은 적었으면 좋겠다.
오후 시간을 한가롭게 보냈다. 비가 그쳤을 때 뒷동산에 올랐지만 또 금세 비가 내렸다. 밤에 비가 그쳤을 때 잠깐 텐트 밖으로 나가보니까 전날과 마찬가지로 별이 많이 보였다. 하지만 바람이 너무 세게 불고 추워서 오래 서 있지는 못했다. 사진도 안 찍었다. 어렸을 때에는 힘들게 여행을 와서 숙소 안에만 있는 어른들을 이해하기 힘들었는데, 막상 중년의 나이가 되고 보니까 힘들어지는 게 참 많다.
아침을 먹고 짐을 싸서 버스에 올랐다. 가이드의 말로는 이식쿨 호수 남쪽으로는 비포장길이 많아 힘들었지만 북쪽으로는 포장길이 많아서 한결 수월하다고 한다.
점심 먹기 전에 간 곳은 제티오구스였다.
제티오구스는 키르기스어로 '일곱 마리의 황소'라는 뜻이다. 붉은 사암으로 만들어진 암석이 마치 황소들이 줄지어 서 있는 것 같아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한국에 많이 알려진 관광지는 아니지만, 현지에 가 보면 관광객이 꽤 있는지 관광객용 식당과 숙박시설이 꽤 보였다.
가벼운 등산을 하면 꼭대기에 커피를 파는데 풍경을 바라보면서 커피 한 잔을 딱 하고 내려오면 된다. 제티오구스 쪽뿐만 아니라 그 뒤편의 풍경도 상당히 웅장하고 아름답다.
한 꼬마 남자애가 매를 한 마리를 들고 관광객을 유혹하고 있는데 돈벌이에는 별 관심이 없다. 키르기스스탄을 여행하면서 느끼는 것인데 여기는 관광객을 상대로 뭔가를 사 달라고 매달리고 귀찮게 하는 사람이 없다. 키르기스스탄보다 국민소득이 많이 높은 베트남을 가도 관광객을 상대로 어린아이들부터 어른까지 뭔가를 팔려고 매달리고 따라오는 때가 많아서 사고 안 사고를 떠나 참 마음을 불편하게 하는데, 키르기스스탄은 그런 호객행위는 공항 외에는 관광지에서는 한 번 도 없었다.
기껐해야 말 타겠다고 한 번 물어보고 싫다면 쿨하게 포기하는 정도?
점심은 꽤 근사한 식당에서 샤슬릭을 먹었는데, 그냥 그랬다. 맛은 있었지만 이런 맛은 처음이야! 할 정도는 아니었고 그냥 아는 맛, 예상하는 맛이었다.
그다음으로는 종교박물관이라는 데를 갔는데, 왜 관광객이 많은지 도무지 이해하기 어려운 곳이었다. 세계 5대 종교 어쩌고라고 하는데, 그렇다고 각 종교마다의 상징물을 제대로 해 놓은 것도 아니고, 그냥 똑같은 건물 첨탑에 마크만 조금씩 바꿔 놓은 것일 뿐이었다. 마침 바자회 같은 걸 했는데 가격이 너무 비싸서 살 엄두가 나지 않았다.
딱히 가치 있는 그림이나 유물이 있는 것도 아니고 유료 관광지라고 하기에는 너무 허접하다. 리조트에 부속된 시설이라고 하면 이해할 수는 있을 것 같다.
다음으로는 암각화를 보러 갔다. 키르기스스탄은 참 돌이 많은데 여긴 벌판에 돌 천지였다. 그 광경이 굉장히 독특했다.
중간중간에 암각화가 있다는 표식이 있는데, 진하게 잘 보이는 것도 있고 흐려서 잘 안 보이는 것도 있다. 특별히 접근을 차단하는 시설이 없어서 훼손 위험이 있지 않을까 싶긴 한데, 다른 나라들도 암각화는 그냥 노지에 노출되어 있을 때가 많으니 특이한 경우는 아닌 것 같다.
오후 6시가 넘어서 이식쿨 호수 유람선을 탔다. 우리 일행만 타는 작은 배였는데 동남아의 드래건보트처럼 낡은 배가 아닌 현대적인 배였다.
유튜브에서 많이 봤어서 나름 기대가 있었는데, 생각해 보면 그냥 호수에 배를 타고 간 것이고 호수가 워낙 큰 데다가 호수 주변에 대단한 볼거리가 있는 것도 아니니 진짜 가슴을 울리는 풍광을 기대할 수는 없지 않았겠나 싶다. 그래도 이렇게 높은 곳에 있는 넓은 호수 가운데에 배를 타고 가 봤다는 것 자체가 의미가 있는 경험이었다.
하이라이트는 역시 수영이다. 배에서는 구명조끼가 준비되어 있기 때문에 수영복으로 갈아입기만 하면 물에 들어갈 수 있다.
그런데 물이 굉장히 차다. 한 겨울 계곡물까지는 아니더라도 깜짝 놀랄 정도로 차기 때문에 마음의 준비가 필요하다. 물에 들어가 보면 바다와 달리 부력이 약하다. 끈적 끈적이 없어 깔끔하고 상쾌한 것은 참 좋은데 부력이 약하면서도 유속이 꽤 있다. 그래서 배에서 자꾸 멀어지니까 좀 무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