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호사 일을 잠시 내려놓기로 하다

이제 겨우 40대 중반이 되었다.


어디 가서 나이 자랑할 정도는 아니지만, 그래도 ‘학생’ 소리는 안 들을 나이가 되어버렸다.


변호사 일을 시작한 지 10년 만에 잠시 내려놓기로 한 것은 약간은 슬픈 가족사 때문이라고 해야겠다. 몇 해 전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바로 다음 해에 누나가 채 오십을 채우기 전에 하늘나라로 먼저 가버렸다. 그다음 해에는 외할머니가 돌아가셨고, 그다음 해에는 고모와 작은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그리고 지금까지 공부만 해 왔던 후배 두 명도 너무 어린 나이에 그렇게 가 버렸다. 겨우 몇 년 사이에 가족과 친척, 후배들의 죽음으로 먼저 슬픔이 다가왔지만 이어서 허망함이 몰려들었다.



우리 집은 너무도 가난했다.


그런데 사실 어렸을 때는 그렇게 가난한 줄 모르고 살았던 것 같다. 왜냐하면 주변 사람들 모두가 다 그렇게 살았기 때문이다. 일곱 식구가 두 칸짜리 반지하에 살면서 장마철만 되면 쓰레받기로 물을 퍼 내는 것이 일상이었다. 화장실은 당연히 집 밖에 있었고 밤에는 초를 들고 갔었는데 냄새도 냄새거니와 빠질까 봐도 무서웠고 꼽등이는 더 무서웠다. 그런데 당시 모두들 그렇게 살았다. 우리 옆집도 그랬고 내 친구들 집에 가도 그랬다. 아파트에 사는 사람들은 우리와는 상관없는 부자로 알았다.


누나들은 중학교를 졸업한 뒤 고등학교는 야간으로 다니면서 일을 나갔다. 첫째 누나와 둘째 누나 모두 그랬다. 그래도 형제자매들이 일을 하기 시작하니 집안 형편이 조금씩 나아지는 것 같았지만 그 속도는 무척 더뎠다. 나는 남들처럼 중학교를 나와 남들처럼 보통의 고등학교를 들어갔으니 누나들보다는 형편이 나았던 것이고 나까지 가계를 도와야 할 정도로 아주 가난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사실 고등학교 때를 추억해 보면 힘들었던 기억은 없고 재미있었던 기억만 있다. 학원에 다니는 애들은 많았지만 별로 부럽지는 않았고 문제집이나 참고서를 마음대로 살 수 없다는 점은 항상 아쉬웠다. 그런데 몇몇 부잣집 애들을 제외하고는 문제집을 마음대로 살 수 있는 친구도 많지 않았으니 내가 가난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래도 나는 일주일에 만 원 정도 용돈을 받았는데 버스비를 빼면 얼마 남지 않았다. 문제집을 한 권 사봐야 일주일이면 또 한 권을 사야 하는데 그 용돈으로는 감당할 수 없었다. 그리고 간식을 참는 것은 고등학생에게는 너무 잔인한 일이었다. 그래서 버스비를 아껴 걸어 다니기로 했다. 학교는 걸어서 한 시간에서 한 시간 반 정도 걸렸던 것 같다. 돈도 돈이지만 학교를 굳이 걸어 다녔던 것은 버스가 일찍 끊겼던 이유도 있었다. 야간 자율학습이 10시에 끝났는데 보통 절반 정도는 남아서 수위 아저씨가 나가라고 할 때까지 더 공부를 했고 그러면 막차를 놓치곤 했다. 그래서 집 방향이 비슷한 애들끼리 걸어가곤 했다. 그때는 그렇게 학교에 오랫동안 남아 있는 아이들이 많았다.


빈부의 격차는 대학에 가니 실감되었다. 잘 사는 집 아이들은 집에서 기본적으로 용돈도 받고 있었고, 장학금을 받거나 대출을 받지 않더라도 등록금을 낼 수 있었다. 그 비싼 등록금을 대출을 받지 않고 낼 수 있는 집이 그렇게 많다는 것은 대학에 가서야 처음 알게 되었다. 대학생인데도 집에서 몇십만 원씩 용돈을 주는 집이 있다는 사실도 처음 알게 되었다.


그즈음 집에 이런저런 일이 터지면서 더 이상 기울 것도 없는 가세가 더더욱 기울어졌는데, 나는 당연히 내가 벌어서 학교에 다니고 생활을 해야 한다고 생각을 했다. 우리 누나는 고등학교 때부터 일을 했으니 사실 나는 늦은 것이었다. 그런데 IMF 직후라 모두 어려울 때여서 알바 자리도 쉽게 나오지 않았다. 아버지는 쌀이 떨어졌다는 말을 자주 했는데, 그 말이 너무 듣기 싫어 집에 들어가기가 싫었다. 이런저런 핑계를 대로 친구나 지인의 집에 얹혀살거나 한평 반 짜리 고시원에서 지내곤 했다. 대학에 다닌다기보다는 알바를 하면서 틈틈이 수업을 들어 학력을 쌓아 취업준비를 했다는 것이 맞을 것이다.


군대를 갔다 와서 엄마가 보태준 100만 원에 알바비를 모아 중국에 어학연수를 다녀왔다. 무려 두 학기나 있었다. 지금 생각해도 중국에 있었던 일 년 조금 안 되는 기간이 내 생애 가장 흥미롭고 행복했던 시간이었던 것 같다. 사실 공부 생각은 거의 안 나고 여행하고 다닌 기억만 있는데 그렇게 일도 안 하고 주야장천 여행만 다니면서 쓴 돈이 300은 넘고 400만 원은 되지 않았던 것 같다. 2004년 당시에도 굉장히 큰돈은 아니었는데 그만큼 중국의 물가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쌌다.


대학을 졸업하고 나름 대기업에 취업해서 죽도록 일만 했다. 회사에서는 진짜 이러다 죽겠다 싶을 정도로 일을 시켰다. 술을 마시다 피를 토하기도 하고 폐렴으로 병원 신세를 지기도 했다. 병원에 입원을 할 정도는 되어야 고작 하루 정도 쉴 수 있었다. 그렇게 회사에서 건강을 갈아 넣어 월급과 바꾸기를 3년을 하다 사직서를 냈다. 이후 로스쿨에 들어가서 3년 만에 변호사가 되었다.



지금 생각해 봐도 내 인생은 평탄했다.


운도 좋고 일도 잘 풀렸던 것 같다. 돈은 좀 없었지만 시험에 떨어져 좌절해 본 적도 없었고, 하고 싶은 일들은 결국은 다 했다. 변호사로 일하면서는 이전에는 없었던 ‘존중’이라는 것을 받게 되었고, 회사 다닐 때의 반만 일해도 수입은 꽤 괜찮았다. 그래도 돈은 모을 줄만 알았지 써 본 적은 별로 없어서 셔츠 하나를 2만 원을 주고 사면 큰일 나는 줄 알았는데, 보다 못한 누나가 이따금 옷을 보내주기도 하고 양복을 몇 번 사주기도 했다. 변호사 10년 간 거의 누나가 해 준 양복을 입고 다녔던 것 같다. 그러던 누나가 갑작스레 세상을 떠났다. 중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일을 해서 지금까지 줄곧 일만 해오다가 이제 좀 살만 해 지니까 허망하게 가 버린 것이다.


나는 월요일 아침에 눈을 떠서 금요일 저녁에 잠이 들 때까지 일을 하다가 그나마 주말에 쉬면서도 일 생각을 해 왔다. 뭐, 다들 그렇게 살고 있을 것이다. 그러다 왜 일을 해야 하는지에 대해 깊이 생각해 봤다. 사실 일은 ‘생존’을 위해서 한 것이지만, 살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일을 해야 한다면 삶이 너무 허무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까지 벌어 놓은 것으로 평생 넉넉하게 먹고살기는 어렵겠지만, 또 언제 끝날지도 모르는 삶에 주야장천 일만 하다가 가기는 싫었다.


내가 가장 행복했던 순간을 떠올려보니 역시나 2004년의 중국이었다. 지금은 상황이 다르지만 그때는 한국에서 한 달 월급이면 중국에서는 일 년까지는 아니더라도 몇 달은 돈 걱정 없이 먹고살 수 있었다. 그러고 보면 나는 참 돈 안 쓰면서도 싸돌아다니는 것을 제일 좋아하는 것 같다.


그래, 지금까지 달려왔으니 한 번 숨 고르기를 해 보자. 그동안 못 해봤던 것, 해보고 싶었던 것을 원 없이 해 보자.


그렇게 나는 변호사 일을 잠시 접고 이참에 세계를 여행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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