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흔은 나와 어울리지 않는 숫자인 줄 알았는데 어쩌다 보니 40대 중반이 되었다.
어디 가서 꼰대짓 할 나이는 아니지만 ‘학생’ 소리는커녕, 시골 할머니한테서도 ‘젊은 총각’ 소리도 못 들을 나이가 되었다. 그래도 늙었다고 하기엔 주제넘고 젊은 축에 속한 것 같기는 한데, 젊은 애들 노는 데에서는 끼워주지 않으니 그냥 우리끼리 노는 나이다. TV를 보면 아이돌들은 하나도 모르겠고 기껏해야 예능이나 보는데 예능프로에 죄다 아는 연예인만 나온다고 해서 젊은 게 아니다. 왜냐면 요즘 애들은 TV를 보지 않아서 예능프로에 나오는 연예인들도 엔간하면 4,50 대거나 젊어봐야 30대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들의 마음은 여전히 고등학생이라서 길 가는 고등학생을 보면 친구 같은데 머리는 빠져가고 몸은 아저씨가 되었다. 20대 때보다 조금 먹고 더 많이 움직이고 심지어 돈 내고 운동까지 하는데 뱃살은 쉽게 빠지지 않는다. 물만 먹어도 살이 찌는 게 아니라 숨만 쉬어도 살이 찌는 것 같다. 병원에 가면 고칠 데가 한 두 군데가 아니다. 20대 때에는 대학병원은 교통사고나 나야 가는 곳인 줄 알았는데, 이제는 대학병원을 하도 자주 가니 의사 선생님과는 개인적으로 휴대전화 번호도 주고받는 사이가 되었다. 언젠가부터 상처가 나면 잘 안 아물더니, 아물더라도 꼭 흉터가 생기게 되었다. 목은 항상 아프고 밤이면 다리가 저린다. TV는 소파나 바닥에 누워서 봤는데 어느 순간부터 안마의자에 앉아서 보기 시작했다. 안마의자에 하도 붙어 있어서 인류가 진화하면 몸에 안마의자가 생기지 않을까라는 생각도 해 보았다.
40대(이하 ‘우리들’이라 한다)는 20대(이하 ‘저들’이라 한다)와 다르다. 우리는 누구에게도 도움을 받을 수 없고 챙겨야 할 사람과 생각해야 할 것들이 많아졌다. 그래도 보통은 10년 넘게 일을 하였으니 운이 나쁘지 않았다면 저들보다는 돈을 조금은 더 모았다는 장점은 있다. 멋 부리기는 여전히 하고 싶지만 멋을 부려도 멋있지가 않으니 과감하게 포기할 수 있고 오히려 창피함이 슬슬 없어지고 있다. 그래서 수영장에 가면 저들은 몸이 좋지 않으면 래시가드라도 입고 있지만 우리는 그냥 웃통을 깐다.
이렇게 몸도 상황도 마음도 변했으니 20대 때의 여행과는 다른 준비가 필요했다. 나는 여행전문가가 아니기 때문에 이 글은 그냥 내 경험이고 고민을 하는 중이라는 말이지 가이드가 아니다. 정답은 모르겠다. 정답이 있는 지도 모르겠고.
예산을 세세하게 짤 수는 없지만 가장 많이 들어가는 게 비행기 값을 비롯한 교통비와 숙박비였다.
비행기는 대한항공이나 아시아나와 같은 풀 서비스 항공사를 이용할 것인지 저비용 항공사를 이용할 것인지를 고민하게 된다. 저비용항공사는 좌석 간 간격이 좁고 기내식 등의 서비스가 유료인 때가 많고 특히나 무료수하물 무게가 얼마 되지 않는다. 그래서 이런저런 비교를 해 보면 풀 서비스나 저비용 항공사나 의외로 가격차이가 별로 없을 때가 많다.
나는 스카이스캐너나 카약 같은 가격비교 사이트에서 대강 검색한 후에 가급적 여행사나 발권대행사이트를 통하지 않고 항공사 사이트에서 예약을 하는 편이다. 비용이 좀 더 나갈 수는 있지만 취소나 변경을 해야 할 때는 더 유리한 점이 많다. 특히 외국계 사이트는 잘 이용하지 않는데, 문제가 생겼을 때 대응이 잘 되지 않았던 경험이 꽤 있기 때문이다. 그냥 돈을 좀 더 내더라도 마음이 편한 게 낫다.
어떤 사람은 세계일주를 할 수도 있겠지만 한국을 오래 비워둘 수 없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부모님을 챙겨야 할 수도 있고, 나처럼 사무실을 접었어도 해결할 일이 아직 많이 남은 사람도 있을 것이다. 나는 그래서 세계일주가 아니라 지역을 나누어 가까운 지역을 몇 달 여행하고 귀국했다가 다시 좀 더 먼 지역을 여행하는 식으로 왔다 갔다 하기로 했다. 가까운 곳을 먼저 가는 이유는 시차 때문이다. 일을 그만두어도 여전히 챙겨야 할 것들이 많은데 시차가 있으면 아무래도 좀 불편하기 때문이다.
세계를 한 방향으로 일주할 것이 아니라 나처럼 여러 번 귀국을 하면 단점이 몇 가지 생긴다. 우선 당연히 항공권 비용이 많이 든다. 또 일정을 짜는 데 제약도 많이 받는다. 일주를 하면 귀국일을 신경 쓰지 않아도 되겠지만 왔다 갔다 하면 아무래도 귀국일이 정해져 있기 때문이다. 또 해외체류기간이 3개월 이내라면 건강보험료도 내야 한다. 항공료와 건강보험료만 해도 꽤 큰돈이라 고민이 되지만, 반면 부모님이나 가족들을 설득하기 쉽다는 큰 장점이 있다. 특히 어르신들은 세계일주를 한다고 하면 반대했다가 두어 달 있다가 온다고 하면 찬성하였다. 별 차이도 없는데 말이다. 한국에서 재정비할 여유가 생긴다는 장점도 있고, 여행지에서 산 물건들이 좀 많아져도 한국으로 부치지 않고 그냥 들고 다녀도 된다는 장점도 있다. 또 성수기나 더운 여름과 추운 겨울을 피해서 다닐 수도 있다. 또 편도 항공권으로 입국하면 출입국심사에서 문제가 생길 수 있다고도 하는데 그런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된다.
입국과 출국하는 지역이 다른 경우, 예를 들어 인천에서 이스탄불로 갔다가 런던에서 귀국한다면 왕복항공권이 아니라 다구간 항공권을 구입하면 된다. 이런저런 비교를 해 보면 왕복항공권보다 다구간항공권이 더 비싼 것 같은데, 처음 출발했던 곳으로 다시 되돌아가는 수고와 비용, 귀찮음과 돈을 저울질해서 결정하면 된다.
항공권이야 어쩔 수 없다고 치고, 숙박비는 참 골치 아프다.
일단 우리는 밤에 자야 한다. 20대인 저들처럼 밤새워 술을 마시다가 아침에 귀가할 수 없는 몸이 되었다. 우리는 늦으면 택시 타거나 아니면 대리를 불러서 집에 간다. 또 매일매일 출근을 하다 보니 아침이면 피곤해도 일단 눈이 떠지게 되었다. 그래서 여행지를 가면 하루 일과를 일찍 시작하고 해가 지기 전에 지쳐서 숙소로 돌아오곤 한다. 눈은 슬슬 노안이 오고 있는데 귀는 더 민감해져서 시끄러운 것을 견딜 수 없다. 20대 때 배낭여행을 할 때는 공원에서도 자 보고 아예 밤을 새웠다가 기차나 버스 안에서 자기도 했지만, 이제는 그럴 수 없다. 게스트하우스는 시끄럽고 다들 어린 친구들이라 이용하기에 살짝 민망하다. 그래서 숙박비가 꽤 많이 들어간다.
교통비도 마찬가지다. 기차에서는 조용히 차창 밖 풍경을 보면서 맥주 한 캔을 까고 싶다. 유레일 1등석과 2등석의 차이는 꽤 커서, 1등석은 꽤 여유롭고 조용하나 2등석은 잘못 걸리면 시끄럽고 짜증 난다. 그런데 약간의 안락함을 위하여 추가로 들어가야 하는 돈이 애매하게 많다. 차라리 아주 큰 차이면 포기하겠으나 유레일패스든 JR패스든 1등석과 2등석의 가격 차이가 참 애매하다.
또 하나의 선택지가 렌터카다. 사실 2명 이상이 여행하면 렌터카나 대중교통이나 가격에서는 별 차이가 없을 때가 많다. 그런데 일단 해외에서 운전을 한다는 게 부담이 된다. 왼쪽 오른쪽 구분은 금방 익숙해지고 교통법규야 유튜브로 몇 번 보면 되는데, 일단 주차를 신경 쓰는 게 참 귀찮고, 주유소는 어떻게 이용해야 하는지 신경 쓰는 것도 귀찮다. 어디 가서 술도 못 마신다. 사고라도 나면 말도 안 통하는 데에서 어떻게 처리 야한지 막막하다. 가뜩이나 나이가 들면서 쓸데없는 걱정이 늘어나는데 이런 것까지 걱정해야 하면 여행을 망칠 수 있다. 나는 렌터카가 주는 여러 가지 장점에도 불구하고 신경 쓰는 게 싫어서 가급적 대중교통을 이용하기로 했다.
이렇게 40대가 넘어가면 챙길 것도 많고 불편한 것도 싫고 체력은 떨어져서 그만큼 돈이 더 들어간다. 그러니 유튜브에서 세계여행 경비가 얼마 들었다고 하는 얘기는 다 저들 얘기다. 2,30대 때보다 배는 더 들어간다고 생각해야 한다.
짐을 쌀 때도 20대인 저들과 다르다. 유튜브를 보면 세계여행을 하며 짐을 싸는 팁이 많이 소개되어 있지만 다 저들의 이야기다. 우리들, 특히 아저씨들은 그렇게 옷을 많이 챙기지도 않는다. 저들은 인스타를 하지만 우리들은 SNS는 잘하지 않는다. 게다가 어디에 내 얼굴 나오는 사진은 올리지도 않는다. 기껏해야 카톡 프로필이나 바꿀 뿐이다. 그나마 바꾸는 카톡 프로필 역시 풍경이거나, 아이 있는 집은 아이 사진 정도다.
우리는 20대 때보다 남들 시선도 별로 신경 쓰지 않게 되었다. 20대에는 슈퍼를 가더라도 옷을 갈아입고 나갔다면 요즘은 웬만한 곳은 그냥 집에서 입던 그대로에서 패딩 하나 걸치고 간다. 20대 때에는 명품까지는 아니더라도 유행하는 브랜드가 박힌 옷이나 가방을 가지고 싶었는데, 요즘은 그냥 편한 게 좋고 원단 좋은 게 좋다. 그래서 정장 아니면 죄다 츄리닝이다. 츄리닝의 세계는 한 번 빠지면 헤어 나올 수 없는데, 나는 집에서 입는 츄리닝, 잘 때 입는 츄리닝, 외출할 때 입는 츄리닝이 모두 다르다. 츄리닝을 입고 헬스장에 가서 또 다른 츄리닝으로 갈아입는다. 더 나이를 먹으면 등산바지에 집착한다고 하는데, 나는 아직 그 나이가 되지 않았다.
그러면 편한 옷만 챙기면 되지 멋을 부릴 이유도 없어진다. 저들은 여행용으로 파우치를 잔뜩 사서 속옷, 잘 때 입는 옷, 외출용 옷을 구분하고, 외출용 옷도 T.P.O. 에 맞게 여러 벌 준비하지만, 우리들은 그냥 입을 옷과 입은 옷만 구분할 수 있으면 된다. 멋을 굳이 부리면 멋있지는 않고 그냥 등산 가는 아저씨 같을 뿐이다. 소매치기의 표적이 되지 않으려면 그냥 편하게 다니는 게 좋다.
하지만 파우치 내지는 지퍼백은 많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저들의 다양한 옷만큼이나 더 다양한 약을 챙겨야 하기 때문이다. 우선 기본적으로 처방약들이 있다. 여행을 가기 전에 의사에게 기간을 길게 처방을 해 달라고 부탁하면 약을 잔뜩 주는데 그게 한 보따리가 된다. 저들은 배탈이 나도 한나절 고생하면 그만이지만 우리들은 한 번 속이 뒤집어지면 며칠 씩 간다. 그래서 상비약도 많이 챙겨야 한다. 저들은 잘 모르겠지만 우리들은 소위 ‘자기에게 맞는 약’이라는 게 있다. 그래서 똑같이 머리가 아프더라도 꼭 아세트아미노펜만 먹는 사람이 있고 이부프로펜만 먹는 사람이 있다. 소화제도 정해져 있고, 위장약도 정해져 있다. 우리들은 원하는 약이 없으면 다른 약을 달라고 하지 않고 다른 약국을 간다. 진통제, 감기약, 지사제, 진경제, 소화제, 항히스타민제, 소독약, 반창고, 파스, 벌레기피제…. 등 챙길 것도 참 많다. 옷이야 필요하면 그냥 가서 사면 되지만 약은 구하려면 골치 아플 수도 있다. 여기에 또 비타민, 오메가 쓰리, 밀크시슬 등 각종 영양제를 챙긴다. 이러다 보니 옷은 개뿔, 약만 한 짐이다.
저들은 세계여행을 가면서 만나는 사람에게 줄 선물로 한국의 작은 기념품을 챙긴다고들 하는데, 사실 여행을 가서 그렇게 많은 교류를 하지 않는다. 30대까지는 여차저차해서 게스트하우스에서 만난 사람들과 함께 다니기도 하고 그랬지만, 40대가 넘어가면 사람들이 피하고 잘 끼워주지 않는다. 사실 우리 스스로도 불편하다. 그리고 게스트하우스보다는 호텔을 선호해서, 프런트 직원 외에는 서로 이야기할 일도 많지 않다.
우리는 그렇게 나이가 많지도 않은데 이상하게도 쓸데없는 걱정이 많고 물건을 잘 버리지 못한다. 그래서 뭐 하나라도 더 챙기려고 한다. 여행지에 가서도 호텔 어메니티는 꼭 챙겨서 나오는데 잘 쓰지도 않는다. 그런데 여행을 하다 보면 짐은 점점 더 늘어나니 처음부터 쓸데없는 물건은 안 챙겨야 한다. 평소에 안 입었던 옷은 앞으로도 안 입을 것이니 챙겨갈 필요가 없을 것이다. 평소에는 우비는 쓰지도 않으면서 여행 갈 때는 꼭 챙기는데 그런 것을 버려야 한다.
그나마 다행인 건 우리는 요즘 문물에 익숙하기 때문에 두꺼운 여행책자를 몇 권씩 가지고 다니지 않고 이북을 이용하거나 스캔해서 패드로 보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것만 해도 여행 짐이 한 2~3킬로는 줄어든다.
캐리어와 배낭은 항상 고민이다. 배낭을 메고 여행을 다녀본 사람은 알겠지만 배낭은 정말 힘들다. 캐리어는 여러 면에서 편하기는 한데 기동성이 떨어진다. 대중교통에서도 확실히 캐리어가 불편하다. 또 배낭과 달리 두 손이 자유롭지도 않다. 나는 배낭만 가지고 다녀본 적도, 캐리어만 가져가 본 적도, 배낭과 캐리어를 모두 가져가 본 적도 있는데, 그냥 캐리어가 편한 것 같다. 캐리어 끌다가 배낭이 필요한 것 같으면 그냥 가서 사면 된다. 뭐 그렇게 생각하면 캐리어도 가서 사면 되긴 하지만 말이다.
아저씨가 되면서 안 좋은 건 쓸데없는 걱정이 늘었다는 것이다. 20대 때 중국을 여행할 때에는 구체적으로 뭘 알아보거나 하지 않고 무작정 돌아다녔다. 사실 그 당시에는 정보를 구할 곳도 별로 없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어떻게 그렇게 다녔을지 모르겠는데, 그냥 무작정 어디론가 가서 도착해서 숙소를 알아보고 교통편을 알아봤다. 가령 낙산대불을 보러 간다면 무작정 낙산에 가서 알아보는 식이었다. 그런데 요즘은 적어도 숙소와 교통편은 예약을 해 놔야 불안하지 않다. 길거리에서 헤매는 것도 나름 재미고 꼭 목적한 대로 이뤄야 하는 것도 아닌데 뭐든 계획을 해야 안심이 된다. 아마 길게 시간을 낼 수 없으니 겨우 몇 박 며칠의 휴가라도 갈 수 있으면 아주 알차게 보내려는 마음이 여행 패턴을 그렇게 바꿔놓은 것 같다. 나이가 더 들면 더 걱정이 많아진다는데, 오죽하면 쓸데없는 걱정을 하는 것을 할머니의 마음, 즉 노파심이라고 하지 않던가.
아무튼, 40대가 되니 준비해야 할 게 참 많아졌다. 여행지를 알아보고 코스를 짜는 게 급한 게 아니라, 우선 주변을 정리해야 한다. 벌여놓은 게 많으니 정리할 게 참 많다. 그리고 몸을 챙겨야 한다. 여행지에 가서 어디 하나라도 고장 나면 골치 아픈데, 이미 고장 나 있는 것도 많으니 고칠 건 미리미리 고쳐야 한다. 여행을 마치고 나서 먹고살 걱정도 해야 한다.
그러고 보면 변호사는 참 좋은 직업이다. 변호사는 이직도 쉽고, 개업도 쉽고, 재개업도 쉽다. 게다가 개업을 할 때 돈도 많이 들어가지 않는다. 치킨집을 하나 하려고 해도 인테리어비에 각종 주방기구를 사야 하고, 경우에 따라 많은 권리금을 줄 때도 있지만, 변호사 사무실은 권리금이라는 것을 줄 일도 없고, 의뢰인이 인테리어를 보고 오는 것도 아니다. 어느 정도 경력이 있으면 취업도 쉬운데 사실 나처럼 10년 차가 넘어가면 취업보다는 개업을 선호한다. 이직과 개업이 쉬우니 선뜻 그만둘 용기가 나온 것이다. 만약 내가 변호사가 되기 전과 같이 계속 회사를 다니고 있었다면 재취업 걱정부터 했을 것이다.
나는 개업해서 내 사무실이 있었는데, 그만두려고 마음을 먹었을 때 마침 사무실을 인수하겠다는 변호사님이 있었다. 그 변호사님은 이번이 처음 개업이었는데 내 물건들을 어느 정도 가져갈 수 있어서 큰돈을 들이지 않고 사무실을 차릴 수 있어 좋았고, 나는 직원의 고용도 승계해 주고 이런저런 물건들을 정리하고 치우는 귀찮은 일을 하지 않게 되어 편했다.
문제는 사무실을 넘긴다고 해도 사건까지는 넘길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의뢰인들은 나를 믿고 사건을 맡겼기 때문에 나는 사건이 마무리될 때까지는 일을 그만둘 수 없다. 결국 기존에 하고 있던 사건이 어느 정도 정리가 될 때까지는 그만둘 수도 없는 것이다. 그래서 사무실을 넘긴 이후로도 1년간은 집에서 업무를 처리해 왔고, 여행을 가서도 노트북을 가져갔다. 혹시 몰라 변호사 동기들에게 미리 부탁하고 공인인증서까지 보내놓았다. 일에 계속 신경을 써야 한다는 점은 여행 루트를 짜거나 짐과 예산을 짤 때 모두 영향을 주었다. 그래서 세계일주를 포기하고 두어 달에 한 번 꼴로 한국에 들어온다는 것이나 첫 여행지를 시차가 없는 일본으로 정한 것도 그 때문이다.
사무실을 정리하고 6~7달이 지나가 슬슬 시간 여유가 생겼다. 빠진 지 십 수년이 지난 어금니에 임플란트 시술을 받았다. 그것 말고도 이래 저리 고칠 치아가 많아 거의 매주 치과에 다녔다. 언제나 수영을 못하는 것이 아쉬웠는데 수영 강습을 받았다. PT도 끊었다. 2년 전부터 대학병원 가정의학과에 두 달에 한 번 꼴로 다니면서 검사를 받아왔는데 간수치가 너무너무 높게 나왔고, 지방간에 고지혈증에다가 요산 수치도 높았다. 안 좋은 항목이 도대체 몇 개인지 기억도 나지 않을 정도였다. 매 끼니마다 약을 한 움큼씩 배부르게 먹어왔는데, 일을 그만두었더니 모두 정상수치로 돌아와 약을 끊었다. 식단을 조절하고 약을 그렇게 먹어도 안 내려가던 각종 수치들은 일이 줄어들면서 급격히 좋아졌다. 그러고 보면 수임료의 대가는 사실 건강이었던 것이다.
이렇게 주변을 정리하고 몸도 고치고 대책도 세우고 마음도 먹었다면 슬슬 루트를 짜야한다.
나는 우선 세계지도를 벽에 걸어놓고 평소에 가고 싶었던 곳이나 TV나 유튜브를 보다가 가고 싶은 곳이 생기면 지도에 표시를 해 놓았다. 그러다 보면 지역이 어느 정도 묶을 수 있게 된다. 사람에 따라 다르겠지만 나는 자연스럽게 동북아, 동남아, 호주+뉴질랜드, 남북미, 유럽+터키+북아프리카로 묶였다. 여기에서 상황과 선호에 따라 바꾸면 된다. 나는 일본에 좀 더 오래 있고 싶어 일본만 떼어 두 달 있기로 했다. 유럽과 터키는 함께 묶어서 가려고 했다가, 최근 지진 영향으로 터키는 유럽 일정에서 빼기로 했다. 북아프리카도 유럽을 가면서 함께 가면 좋을 것 같기는 한데, 일정이 너무 길어지니 빼기로 했다. 그런데 사실 꼭 미리 모든 계획을 세울 필요는 없고 그냥 큼직한 계획만 세워놓고 세부적으로는 그때그때 임박해서 정하면 될 것이다. 어차피 계획은 항상 틀어진다.
다만 20대 때와 달리 계획이 없으면 불안하고, 길거리에서 헤매는 것을 잘 못하기 때문에 대강의 순서와 일정은 짜게 된다.
40대가 되면서 달라진 것은 예전처럼 가고 싶은 곳, 하고 싶은 것이 많이 줄어든다는 것이다. 특히 20대 때 여행깨나 가봤던 사람이라면 웬만큼 크고 화려하고 투명하고 아름다운 것이 아니면 별 감흥이 없다. 그래서 인공보다는 자연을, 도시보다는 시골을 선호한다. 그래서 여행깨나 해본 사람이라면 자꾸 오지를 찾게 된다. 그러면서 남들 안 가본 곳을 가야 하는 '홍대병'이 생긴다. 그런데 반면 교과서에 나오거나 TV에 나오는 데는 어디 가서 자랑이라도 해야 하기 때문에 꼭 가야 한다. 이러한 딜레마가 루트를 짤 때마다 고민이 된다.
또 루트를 자다 보면 가고 싶었으나 어쩔 수 없이 빼야 하는 곳이 꼭 생긴다. 가령 나는 요론 지마에 가고 싶었으나 이번 여정에서는 뺐다. 동선에도 문제가 있지만 금전적인 문제도 있었다. 그렇게 빠진 곳은 50대에는 꼭 가야겠다.
물가가 싼 곳이야 상관없겠지만 물가나 특히 교통비가 비싼 곳은 미리 일정을 짜게 된다. 그러면서 고통이 시작된다. 가령 JR패스는 제일 긴 것이 21일권인데 22일째부터는 어떻게 할까를 고민하게 된다. 그러면서 이걸 사는 게 맞을까를 고민하게 되고, 그러다 보면 어느 도시에 얼마나 있을까를 정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다 보면 일본 전체를 다 공부하게 되고, 여행을 가기도 전에 지치게 된다. 그래서 꼭 예약해야 되는 것만 체크하고 구체적인 일정은 그냥 가는 길에 생각해 봐야 지하는 마음으로 하게 되었다. 가령 5월 16일 오키나와 나하공항으로 가는 비행기표와 5월 28일 이시가키에서 후쿠오카를 가능 비행기표를 사놓고 그 사이에서의 일정은 그냥 그때 정하는 식이다. 그런데 사실 생각해 보면 이시가키에서 후쿠오카 가는 비행기를 못 타게 되어도 어차피 10만 원도 안 하는데, 속은 좀 쓰리겠지만 뭐 대단히 걱정할 일도 아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