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이타 현 유후
세계여행의 시작을 유후로 한 것은 아니었다. 그냥 코로나로 막혔던 국경도 풀렸고, 좀이 쑤셔서였다. 그래서 어딘가 짧게 갔다 오고 싶었고 도전보다는 휴양을 하고 싶었다. 그래서 선택한 도시가 유후였다.
유후는 규슈 오이타현 중간쯤에 있는 작은 도시인데 인구가 3만 명 정도라 우리나라로 치면 군보다도 작은 읍 정도 규모라고 할 수 있다. 유후라는 도시 이름보다는 유후인온천이 유명하다.
유후는 나에게는 우여곡절이 많은 곳이다.
처음으로 일본여행을 갔을 때에 버스를 잘못 타서 못 간 곳이기도 하고, 몇 해 전에 갔을 때에는 가자마자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 한국으로 바로 귀국했던 곳이기도 하고, 코로나 직전에는 엄마와 함께 갔다가 몸이 아파 고생을 했던 곳이기도 하다. 그러고 보면 나는 유후에 일방적으로 구애를 했지만 계속 차이기만 했었다.
유후, 좀 더 좁혀서는 유후인에 가는 방법은 대개 후쿠오카 공항으로 도착하면 기차나 버스를 타고 오이타 공항으로 도착하면 버스를 타고 가는데, 오이타 공항이 작지만 작고 사람도 적어서 더 좋았던 것 같다. 예전에는 티웨이항공에서 인천-오이타 직항 노선을 운항하였다가 코로나로 없어졌고, 지금은 인천에서 후쿠오카를 가서 버스나 기차로 가는 방법밖에 없다.
버스는 싸고 한 시간에 한 대 꼴로 있다. 그래서 별로 기다릴 일이 없지만 인기가 좋을 때는 예약을 하는 것이 좋다고 한다. 나는 이번에는 후쿠오카공항에서 버스를 타고 유후인으로 갔다가 돌아올 때는 유후인노모리 기차를 타고 올라오기로 했다. 그렇게 가면 돈은 더 많이 드는데 기차를 꼭 타고 싶었다. 기차로 왕복하지 않은 것은 유후인으로 가는 버스가 후쿠오카공항을 거쳐서 가기 때문에 편해서였다. 기차는 하카타 역에서 타야 하는데 역이 꽤 크다. 서울역의 혼잡함을 생각해도 좋을 것 같다. 후쿠오카 공항에서 하카타역까지는 지하철로 겨우 10분 남짓이라 아주 가깝다.
기차를 탔다면 유후인 역에 내리면 되고, 버스를 탔다면 유후인 역 앞 버스센터에서 내리면 된다. 버스센터는 역 바로 맞은편이라 기차나 버스나 거의 같은 곳에서 내린다고 봐도 된다.
유후인 역부터 가장 번화가라고 할 수 있는 유노츠보 거리를 지나 긴린코 호수까지는 높은 빌딩은 없고 기껏해야 2층 짜리 건물이 전부이지만 항상 북적이는 곳이다. 네모난 현대식 건물도 있지만 일본식의 목조건물, 우리 입장에서는 '적산가옥'이 많아 확실히 일본 스러운 느낌이 난다. 거리에는 식당과 기념품 샵, 각종 소품을 파는 상점들이 많은데 관광지답게 싼 편은 아니다. 인사동 비슷한 거리지만 인사동처럼 거대하지는 않다. 예전에는 거리에서 들려오는 언어는 한국어가 반이고 중국어가 반이었는데, 코로나 이후로는 대개 한국어가 들리고 간간히 일본어와 광둥어가 들린다. 베트남에 경기도 다낭시가 있다면 규슈에는 충청북도 유후시가 있다고 할 수 있겠다.
인터넷에서 검색하면 많이 나오는 식당에는 항상 사람들이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는데, 막상 먹어보면 굳이 줄을 서서 기다릴 정도로 맛이 있다거나 독특한 체험인 것은 아니다. 사람들이 유후인을 찾는 이유는 대개 온천 때문이니 식도락을 기대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냥 관광지에서 재미 삼아 간식거리를 먹는 정도의 수준이다. 전주한옥마을과 비슷한 느낌이다.
유노츠보 거리는 소품샵이 많아서 굳이 사지는 않더라도 구경하는 재미가 있다. 거리 입구에 지브리 캐릭터 상품을 파는 동구리공화국이라는 샵이 있는데, 마당에 포토존이 있어서 사람으로 항상 북적인다. 후쿠오카 캐널시티에도 같은 상점이 있기는 한데, 상품 구성이 꽤 다르다.
일본에 가면 이상하게도 지브리 상품을 사게 된다. 그 지역과 별로 상관이 없어도 그렇게 된다. 사실 중국에 기반을 둔 쇼핑몰에서 짝퉁을 직구로 사면 배송비까지 포함해도 10분의 1 가격으로 살 수 있지만, 굳이 먼 곳까지 가서 어디서나 구할 수 있는 애니메이션 캐릭터 상품을 사 가지고 오는 이유는 그냥 귀여워서다. 안 본 애니메이션 캐릭터도 좋아하는데 마녀배달부 키키는 3번쯤 시도했다가 매번 끝까지 못 보고 잠들었지만 그래도 거기 나오는 까만 고양이 캐릭터는 좋아한다.
비싼 돈을 주고 캐릭터 상품을 사 왔던 건 가까이 두면서 나름 추억이 되기 때문이다. 예전에 여행을 가면 꼭 그 지역 이름이 쓰여 있는 기념품을 사 오곤 했다. 그런데 그런 기념품들은 하나같이 못생겨서 보이는 곳에 잘 두지 않게 된다. 기념품이라는 게 사실 누구에게 자랑할 것도 아니고 집에서 나 혼자 볼 건데 굳이 지역 이름이 있을 필요가 없다. 나는 유후인에서는 토토로 수건을, 후쿠오카에서는 토토로 티포트를 사 왔는데 토토로 수건은 유후인에서 사 왔기 때문에 특별한 것이고 토토로 티포트는 후쿠오카에서 사 왔기 때문에 특별한 것이다. 가까이 놓고 볼 때마다 추억할 수 있으니 꼭 여행지 이름이 쓰여 있지 않아도 된다. 그러다가 친구라도 집에 찾아와서 이쁘다고 해 주면, “이거 유후인에서 산 거야”라고 할 수도 있으니 지역 이름 들어간 촌스러운 기념품보다 자랑하기 더 좋다는 건 덤이다.
그래도 뭔가 그 지역에서만 파는 것을 갖고 싶다는 욕심이 있는데, 예전에 두브로브니크에 갔다가 에어비앤비 호스트 아주머니가 선물이라며 냉장고에 붙이는 마그넷을 하나 준 적이 있는데, 그게 싸고 가벼워서 이후로는 하나씩 사 모으려고 하고 있다.
동서로 이어진 유노츠보 거리에서 조금만 벗어나면 어김없이 넓은 밭이 있는 시골 길이 펼쳐진다. 지나가는 사람이 드물어 마스크를 벗어도 된다. 시골 하면 생각나는 쓰레기 태우는 냄새나 가축 분뇨 냄새도 없고 길가에 아무렇게나 버려진 쓰레기나 낙엽도 없다. 너무도 일본 스러워서 일본 소도시 여행이라고 하면 기대하는 딱 그 분위기다. 사람들이 북적이고 온갖 쓸데없는 물건을 파는 관광지에서 갑자기 한적한 시골마을이 나타나니 참 신기한 조합이다.
유후인 역에서 예약해 놓은 료칸까지는 걸어서 20분 정도 거리였다. 캐리어를 끌고 가지 못할 거리는 아니었지만 번거로울 것이었다. 그런데 좀 알아보니 유후인 역 근처에서 짐을 료칸으로 보내주는 서비스가 있었다. 요금은 무게와 상관없이 가방의 수로만 셈하였다. 이 지역 료칸협회 같은 데에서 하는 것이라는데, 료칸에 짐을 놓고 나오는 시간도 아낄 수 있고 역에서부터 걸어가며 이 동네를 즐길 수 있으니 편리했다.
많은 여행자들이 그렇듯 나도 대개 여행지에 도착하며 우선 숙소로 가서 짐을 풀거나 맡기고 밖으로 나오는 편이다. 보통은 체크인 시간 전이거나 체크아웃 이후로도 짐은 맡길 수 있는데, 지금까지 가본 곳 중에서는 짐을 맡길 수 없는 곳은 우리나라 모텔 밖에 없었다. 우리나라 모텔은 체크인도 매우 늦고 세탁실이나 주방과 같은 공용시설이 없을 때가 많다. 기본적인 서비스가 제공되지 않을 때가 많은데 그에 비해 가격은 너무 비싸고 담배 냄새가 날 때가 많다. 애초에 여행자를 위한 시설이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게다가 특히 남자들끼리 낮에 들어가는 게 무척 민망하다. 이러한 숙박 환경은 국내여행을 하기 싫어지게 하는 요소 중 하나이다.
웬만한 관광지나 기차역에는 코인로커가 있어 짐을 맡길 수는 있으나 사실 여행자 입장에서는 좀 부담된다. 가격이 싸지도 않지만 그것보다는 사용법을 잘 모른다는 게 더 부담이다. 관리인이 있으면 좀 낫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어설픈 설명서와 ‘감’에 의지해야 하는데, 이게 불안하니 잘 이용하지 않게 된다. 그래서 숙박을 하지 않는 도시를 갈 때에는 코인로커보다는 관리인이 있는 짐 보관소가 더 마음이 편하다.
아무튼 그렇게 짐을 배달시키고 유노츠보 거리에서 늦은 점심을 해결하고 이것저것 구경을 하다가 예약을 해 놓은 료칸에 갔다. 역에서 맡겨놓았던 짐은 방으로 옮겨져 있었다. 이번에 묵은 료칸은 방이 6칸인가 8칸인가 쯤 되는 작은 곳이었는데, 공용탕은 없고 2개의 전세탕을 쓸 수 있는 곳이었다. 이곳으로 예약을 한 이유는 한국 돈 3~40만 원 정도 하는 가격으로 방으로 가져다주는 가이세키 요리를 맛볼 수 있기 때문이었다. 가이세키는 나도 처음이었는데, 제공하는 방식이 료칸마다 달라서 손님이 식당으로 내려와야 하는 곳도 있고 음식을 방으로 가져다주는 곳도 있다. 우리는 여기서 2박을 하기로 했고 2박 모두 가이세키를 주문하였다. 1박에 3~40만 원이 결코 적은 돈은 아니지만 2명이서 전세탕을 이용하면서 아침과 저녁을 코스요리로 먹는다는 것을 생각하면 꽤 합리적인 가격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도 요리의 질도 꽤 괜찮은데 말이다.
주인아주머니는 무척 친절하였는데 내가 일본어를 못 하고 서로 영어가 불편하다 보니 번역기로 대화를 하였다. 번역기가 아무래도 아직은 성능이 아주 좋지는 않다 보니 완전한 한국어는 아니었지만 대강 문맥과 눈치로 알아들을 수 있었다. 그러고 보면 친절하기만 하면 절반은 먹고 들어가는 것 같다. 나도 서비스업 자영업자다 보니 어딜 가더라도 주인이나 직원들의 태도가 신경 쓰이는데 이번에 묵었던 료칸은 지내는 동안에 딱 기분 좋을 정도의 친절함이 마음에 들었다.
친절이 지나치면 간섭이 되고 오지랖이 된다. 내가 필요하고 궁금할 때 알려주면 친절이지만 안 필요한데 알려주면 쓸데없는 오지랖이 되는 것 같다. 예전에 부산에 여행 갔을 때 묵었던 작은 호텔에서 관리인 아저씨가 입구에서 마주치기만 하면 어디 갔다 왔는지를 묻고 어디 식당이 괜찮다고 알려주곤 했었는데, 솔직히 그 아저씨를 피해서 다니고 싶었지만 로비를 지키고 있어서 참 불편했다.
이번에 묵었던 료칸에서는 딱 필요할 때만 알려주고 쓸데없는 질문은 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무뚝뚝한 것도 아니어서 가령 전세탕이 다 차 있으면 자리가 나면 전화해 주겠다고 했는데, 전화를 받고 내려갔더니 탕이 깔끔하게 정리가 되어 있었다. 앞에서 이용한 사람이 나가고서 정리한 다음 부른 것이다. 게다가 둘째 날에는 조식과 석식이 모두 전날과 다른 메뉴로 나왔는데 알고 보니 우리만 특별히 메뉴를 바꿔 준 것이었다. 하루만 묵었던 다른 팀들에게는 우리가 전날 먹었던 식사가 나왔다. 둘째 날 료칸에서 나가려고 하자 주인아주머니가 급하게 불러서는 “점심을 조금만 먹고 배를 비워서 오세요”라고 하였는데, 그날 저녁 정말 어마어마한 양의 가이세키 요리가 나와서 차라리 점심을 굶고 올 걸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 료칸은 부킹닷컴에서 평점이 무려 10.0으로 이용객 모두가 만점을 준 곳이었다. 다만 이용후기가 몇 개 되지 않아서 다소 도전해 보는 느낌이었는데, 나 역시 만점을 줄 수밖에 없는 서비스였다. 전세탕이 특별히 좋은 것도 아니었고 건물도 낡은 데다가 대규모 료칸처럼 한국인 직원이 있는 것도 아니고 직원들이 영어를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지만 주인아주머니의 은근한 배려가 느껴져서 참 기분이 좋은 곳이었다.
가이세키 요리는 규칙이 있고 순서가 있다. 책에서는 참 자주 보았는데 기억이 나지는 않는다. 뭐, 그냥 잘 먹으면 되는 게 아닐까. 우리가 묵었던 료칸은 간장을 참 잘 쓰는 곳이었는데 요리가 대체적으로 짭조름했다. 요리에 전분을 많아 쓰고 재료의 질긴 부분에는 다 칼집을 넣어 씹을 것도 없이 죄다 꿀떡꿀덕 넘어가는 것들이었다. 심지어 사시미조차 숙성을 시켜서 쫀득 쫀득이 아니라 부들부들 이어서 이빨은 그냥 지나갈 뿐 목구멍으로 꼴딱 넘어갔다. 여기 사람들은 다 치아가 부실한가라는 의심이 들 정도였다. 그냥 주인장이 취향이겠지만 말이다.
유후인은 아침, 저녁에 식사할 곳이 마땅치가 않아서 예전에 갔을 때는 슈퍼에서 이것저것을 사 오곤 했는데, 료칸에서 아침, 저녁을 주니까 낮에 관광을 하면서 점심만 간단히 때우면 되니 여러 모로 좋았다. 음식을 방으로까지 가져와서 설명을 해주니 대접받는 느낌이라서도 좋았다. 그러고 보면 역시 돈은 많이 벌어야 한다.
전세탕의 물은 약간 알칼리성이었는지 미끌미끌한 느낌이었다. 아침, 저녁으로 온천을 하니 없던 피로도 풀리는 느낌이었다. 후쿠오카에서 묵었던 호텔에도 인공온천으로 된 공용탕이 있었는데 인공온천은 물이 확실히 세다는 느낌이 든 반면 유후인 온천은 부드러워서, 구체적인 효능은 몰라도 그냥 몸을 담그면 피부든 뭐든 다 좋아질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