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삶이 내 삶인 거야

영화 <시라트> 리뷰

by 사유의 서랍

* 본 리뷰는 영화의 줄거리를 소개하는 면에선 불친절하고 이미 본 분들에게 영화의 의미를 던져보는 리뷰에 가깝습니다.

* 포스터 아래로 스포일러 밭입니다. 스포일러를 최대한 밟지 않고 영화를 보시길 권해드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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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가 시작하며 영화제목인 '시라트'의 의미설명이 흘러나온다. 시라트는 천국과 지옥을 잇는 다리로, 그 길은 머리카락보다 가늘고, 칼날보다 날카롭다고 한다. 주인공인 루이스는 행방불명된 딸을 찾아 마치 시라트와 같은 길로 여행을 떠난다. 사막에서 스피커만 설치할 수 있으면 음악을 틀고 춤을 추는 레이버를 따라서, 마치 칼날과도 같은 위태로운 길을 말이다. 레이버들의 차는 탱크같기도 하고 캠핑카 같기도 한, 어느 정도의 깊이의 강물도 지날 수 있고 사막과 산길에도 끄덕없지만 루이스의 작은 봉고는 강물도 지날 수 없고 모든 길에 뒤로 한참을 처져 레이버들의 차가 뿌리는 온갖 먼지는 다 맞으며 겨우 따라간다. 루이스가 기름 살 돈을 보태고, 아들이 음식을 나누면서 레이버들과 루이스 일행은 조금씩 '함께'가 되어간다.


레이버의 트럭하나가 험한 산길 위 구덩이에 바퀴가 빠진 것을, 루이스는 레이버들과 힘을 합쳐 차를 빼내는데 성공한다. 성공을 자축하던 순간, 루이스의 아들과 강아지가 탄 루이스의 차가 절벽으로 굴러떨어지며 루이스의 아들과 강아지는 죽는다. 루이스는 아들의 유해를 수습하지도 못하고 도움을 구하러 가는 레이버들의 차를 타고 간다. 하지만 어디에도 도울 이는 없고, 그들은 완벽하게 신에게서 버려진 것 같다. 루이스는 홀로 사막을 가며 왜 자신만 살아남았는지를, 이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를 울면서 고민하는 것 같다. 하지만 하늘은 답을 들려주지 않는다. 홀로 떠돌던 루이스를 레이버들이 찾아내 그들은 다시 딸을 찾는 여정에 오른다.


사막 한가운데 차를 세우고 레이버들은 루이스를 위로할 자리를 마련한다. 스피커를 틀고 춤을 추는 레이버들을 멍하니 바라보던 루이스는 이내 레이브에 몸을 맡기고 스스로에게 위로와도 같은 춤을 춘다. 춤에는 목적도 이유도 없다. 어쩌면 삶도 그렇다. 그저 삶의 흐름에 몸을 맡길 뿐이다. 좀더 멀리 움직여 춤을 추던 제이드가 지뢰를 밟아 죽는다. 그를 향해 가던 토닌 역시 죽고 남은 레이버들은 충격에 빠진다. 그들은 지뢰밭 한가운데서 춤을 추고 있었던 것이다.


다음날 아침, 루이스는 둘을 묻어주고 그 앞에 앉아있다. 둘을 묻어주는 동안 루이스가 어떻게 살아남았는지는 알 수 없다. 그 이후도 마찬가지다. 레이버들의 트럭을 앞서 지뢰밭에 들여보내보았지만 둘다 터져버리고, '살 길'은 더 요원해진 것 같다. 그 길을 루이스는 간다. 그리고 살아남는다. 루이스가 갔던 길을 그대로 밟아 가던 비기는 지뢰를 밟아 죽는다. 루이스는 어떻게 살아남은 거냐는 질문에 "아무 생각없이 걸었다"고 대답한다. 그 말을 따라 남은 레이버들은 눈을 감고 걸어 살아남는데 성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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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스와 레이버들은 제3차 세계대전이 일어난 가상의 세계 속 존재들이다. 모두가 서로를 죽이기 위해 분투하고 살아남는다고 하더라도 삶은 힘겨워지는 세계 속에 '살아가고 있다.' 그 속에서 삶을 향한 욕망은 마치 비현실적이고 불가능한 판타지같다. 차를 운전해서 피난을 가기에 석유는 비싸기 그지없고 식료품은 동나기 직전이다. 실제로 일행의 절반 이상이 그 확률이 비추지 않는 쪽에 떨어져버렸다. 죽음의 확률을 내 삶에 대보고 그나마 안전한 쪽으로 위태롭게 한발짝 두발짝 내딛어볼까? 그것이 얼핏 현명한 것 같다. 하지만 이런 질문을 해볼 수 있을 것 같다. 나는 살기위해 살아가는가? 나는 무엇을 위해 이 삶에 이 조건에 놓여있는가? 나는 왜 한치앞도 알 수 없는 삶에 놓여있어야 하는가?


삶은 살아남는것도 아니고, 삶에 목적도, 이유도 없다. 그저 '살아있음'일 뿐이다. 지뢰밭길 어디를 걸으면 저 길보다 살아날 확률이 높겠지만, 그 확률은 아무도 모른다. 살아있으면 더이상 확률은 의미가 없고 1의 이벤트가 될 뿐이다. 루이스와 레이버들이 가는 길은 죽음의 불길이 타오르는 가운데 우연히 올라간 칼날 위다. 이미 올라갔다면, 그 칼날이 얼마나 날카로운지는 의미가 없다. 왜 그 칼날 위에 있는지도 의미가 없다. 앞으로 그 칼날 위에 계속 존재하려면 어떻게 해야하는지 고민할 필요도 없다. 물론, 그 칼날에서 떨어져버린 이유도 마찬가지다. 그 칼날이 0.7의 가능성을 가지고 있든 0.01의 가능성을 가지고 있든, 그들이 올라선 이상 그것은 1로 존재할 뿐이다.



영화 속 시라트가 천국과 지옥을 잇는 길이라면, 영화 밖의 시라트는 타나토스와 에로스 모두를 겸허히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실존의 여정이다. 자신이 죽음에 이르고자하는 욕망을 피하고자 한다고 사는 것이 아니고, 살기위해 고민하고 살 수 있는 길만을 선택한다고 사는 것이 아니다. 타나토스가 잠식해들어가는 공간에 집착해서 살아남는데에 연연하는 데 삶이 있지 않고, 생명력에 취해 타나토스를 외면하는 것도 현실 속에 삶이 있지 않다. 삶은 평온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욕망과 태동하는 생명력이, 서로를 이끌고 밀며 공존하는 여정이다. 지옥불 위에 있음은 알고 있되, 나는 -그것이 좁든 넓든- 길 위에 서있음을 인정하는 것이 삶이다. 죽음이 슬프고, 또 가까워서 무섭더라도, 나는 살아있음을 인정하고 가파르나마 그 길 위에 서있기를 선택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길의 의미를 직시하는 것, 그것이 삶이라고, 영화 <시라트>는 말하고 있는 것 같다.



2026.1.27

시라트는 시네마다



- 아이가 죽는 장면에서 영화적 금기를 어긴 것 같아 당황하며 밑에 살아있겠지? 하고 계속 기대하는 내가 있었다. 끝내 그 아이가 죽은 게 영화 내에서 분명해졌을 때, 배신감까지 느껴지더라. 영화가 끝나고나니 그 감정까지 영화에 포함된, 영화적 경험인 것 같아서 영화가 달리 보였다. 어쩌면 전쟁 속에서 실존적 위기를 체험하는 사람들은 다들 그런 의문을 한번쯤 하고 넘어가겠지, 싶었던 것이다. '왜 나만 이런 고통을 겪어야 하지?'에 이어 '신이 나에게 왜 이러지?'의 배신감까지.


- 하지만 그래도 내게 그런 충격을 준 것은 신이 아니고 감독이므로... 감독님 제 눈에 띄시면 안됩니다. 제 안의 존윅이 뛰쳐나올지도 몰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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