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소년미 있는 마스크를 좋아한다. 소년같은 느낌의 강모 배우, 해사하지만 어딘가 아픔이 있는 것 같은 생김새의 김모 배우, 반항기를 대표하는 느낌의 유모 배우 등이 '소년미' 검색어에 떠오르지만 나는 정작 그 배우들은 이 카테고리에서 좋아하진 않는다. 나는 영화 <도둑들>에서 사랑에 배신당하고 상처받은 얼굴의 김윤석에 반했다. 나는 영화 <침묵>에서 순수하게 사랑에 빠진 연기를 하던 배우 최민식의 웃음을 기억한다. 나에게 소년미는 자신의 내면이 있는 그대로 드러나는 순간에 찾아온다고 생각한다.
눈이 크면 감정을 더 잘 담을 수 있는 것 같다. 하지만 생김새는 아주 큰 상관은 없다. 소년미에서 '소년'이 상징하는 것은 일종의 순수함, 투명함의 범주다. 마음을 순수하게 드러내고 상처를 투명하게 내비칠 수 있다면 눈이 세모, 네모여도 소년미가 있다고 이름 붙일 수 있다. 어떤 문제에 부딪혀도 그 문제가 나이나 지위에 의존하지 않고, 마음을 다해 문제를 마주하고 있는 그대로 고민할 수 있다면 외형과는 상관없이 그 얼굴은 소년미가 있는 얼굴이다.
소년미 있는 얼굴에 나이는 더 상관이 없다. 실제 소년의 나이를 원하거나 소년에게 이상한 마음을 품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쇼타콤이라고 하던가). '소년'이라는 단어는 소년이 아닌 사람이 가지고 있을 때 더 의외성이 있고 매력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나이가 들수록 속에 품은 것이 많아지니 여전히 투명하게 드러낼 수만 있다면 드러나는 것은 훨씬 깊이 있는 무엇이 된다. 얼굴에 하나둘 드리워진 주름의 수만큼 많은 아픔과 그 아픔의 기억을 넘어서 새로운 사랑에 뛰어들 수 있는 순수한 용기가 담긴 눈이 주는 조합이 좋다.
소년미 있다, 는 말은 남녀와 직업 또한 가리지 않는다. 나는 이 범주에서 신원호 감독님과 변영주 감독님을 좋아한다. 작품이 순수하다. 연출에 임할 때 그들의 표정에서 읽히는, 모든 에너지와 열정을 쏟아붓는 느낌이 좋다(그리고 예능에 나와서는 한결 편하게 농담하는 모습과의 갭 또한 아주 좋아한다). 또한 나는 이 범주에서 유재석과 지드래곤을 좋아한다. 아무래도 자신의 내면을 드러내고 내가 그것을 접하려면 배우라는 직업이 수월하지만 - 그래서 좋아하는 배우가 참 많지만 - 예능과 각종 다큐도 부분부분 그러한 표정과 자세를 읽어낼 수는 있다. 유재석이 런닝맨 제지공장편에서 혼자 남아 다른 팀 멤버들을 마주하러 갈 때 그 결연한 표정과 본드 ost의 결합이 주던 희열을 잊지 못한다. 수십번을 봐도 일견 예능과 어울리지 않아 보이는 이 진지한 표정이 좋았다. 지드래곤은 입덕한 계기가 된 데뷔 다큐에서의 모습이 그랬다. 같은 팀으로 데뷔를 앞둔 후배들한테는 날서고 무서운 리더의 모습이었다가 자기가 처음 쓴 가사를 샘플링에 얹은 곡을 선배한테 들려주러 가서는 보이던 긴장과 칭찬 받은 후 보이던 순수하게 기뻐하던 모습 때문에 오래 좋아하게 되었다. 그가 프로듀싱한 곡에서는 여전히 진심과 열심의 마음이 비친다.
소년미 있는 얼굴, 에서 가장 많은 수가 배우일 것이지만 망태기의 변화가 심한 것도 배우다. 캐릭터가 아파하고 고민하며 나아가는 역할인데 너무나 잘 해내면 관심이 생긴다. 하지만 한동안 소년미와는 거리가 먼 캐릭터만 주로 맡는다면 잘 보지 않게 된다. 응사 쓰레기 역의 배우 정우를 보면 그랬다. 나는 응사 쓰레기 역이 이 배우의 섬세함과 슬픔을 잘 드러내주었다고 생각해서 멜로에서의 마스크가 궁금했었다. 하지만 찌질한 배역은 해도 연약한 내면을 드러내는 배역은 이후로 안 맡더라. 아마도 대본이 들어가는 것도 주로 액션이 들어가는 것도 있겠고 배우 본인이 자신의 나이를 생각해서 어떤 역은 안되겠다 생각하는 것도 있을테지, 하고 이해는 할 수 있지만 그래도 나는 여전히 그의 강점인, 섬세한 감정을 온몸으로 보여주는 연기를 보고싶다.
같은 맥락에서 슬기로운 의사생활에서 산과 양석현 교수를 맡았던 김대명 배우의 행보도 궁금하다. 눈이 정말 보석같은 배우다. 눈이 맑고 커서 감정이 잘 드러난다. 그 눈에서 장난스러운 모습도 보이고, 슬픔도 잘 드러나고, 차갑고 알수없는 느낌도 난다. 따듯하고 주변을 돌보는 심성이 드러났다가 차가운 분노로 한순간에 돌아서는 연기도 좋다. 앞으로도 이 배우의 섬세한 감정의 변화가 드러나는 연기를 오래 보고싶다.
소년미가 장르를 가리는 것 또한 아니다. '의외성'이 있을 때 더 매력적이고, 그렇지 않을 것 같은 장르에서 상처받은 표정이 드러나면 캐릭터도 드라마도 입체적으로 느껴질 수 있으니까. 나는 <어톤먼트>와 <비커밍제인>의 제임스맥어보이의 순수한 눈망울에 반했는데, <원티드>에서 나태한 눈빛에서 강렬한 눈빛으로 바뀌어 가던 그 연기도 좋아한다. 드라마 <미생>에서 자신만을 믿고 따른 팀원을 지켜주지 못했을 때 먼저 상처받은 것 같았던 배우 이성민의 표정이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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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소년미 있는 얼굴은 내면을 투명하게 드러내는 마스크에 가깝다. 지위나 권력, 가진 부의 크기가 그의 고민을 한방에 해결해주지 않고, 문제에 온 마음과 온 감정으로 있는 그대로 뛰어들었으면 좋겠다. 사랑문제는 여자들이나 하는 고민이지, 폄하하지 않고 자신의 민낯을 드러낼 줄 아는 연기를 했으면 한다. 그 속에서 슬퍼하고 즐거워하며, 고민하고 괴로워하고, 자신이 찾은 사랑에 눈물흘리며 기뻐했으면 좋겠다. 주변과 소통하고 공감하며 미묘한 감정의 변화를 보여줄 수 있다면, 그의 소년미 능력은 매우 높은 등급이라 하겠다.
이런 글을 쓰는 이유는 남성에게 타자화를 시도하거나 나의 이상형을 드러내고자 함은 아니다. 나는 소년미, 소년미, 하면서 톤이 높은 목소리를 가지고 선이 가는 동안 외모의 남자배우들이 대충 사랑에 눈물 몇번 흘리고 몇십억씩 받아가는 로맨스/멜로물이 그만 보고싶다. 멜로나 로맨스물에서 섬세한 감정연기나 잘생긴 외모로 빵뜬 남자배우들이 멜로나 로맨스물을 폄하하며 액션이나 범죄물 같은 '선이 굵은' 장르물로 서둘러 옮겨가는 꼴도 그만 보고싶다. 가슴 몇 번 보여주고 섹슈얼리티를 담은 척하는 작품, 카메라 뒤에 숨어 여성의 몸매를 훔쳐보기 바쁜 남자감독의 시선만 가득하면서 여성의 삶 운운하는 작품들이 정말 꼴보기 싫다.
정의, 민주주의를 논하며 거시적인 공동선(common good)을 논한다면, 미시에서의 공동선은 섹슈얼리티와 사랑 빼고 논할 수 없다. 우리는 섹슈얼리티라는 배를 타고 에로스를 동력으로 사랑이라는 공동선을 '관계'에서 만들어 가는 것이다. 사랑이 마치, 관계에 미시적인 민주주의를 가져오는 것 같은 변화를 보고싶다. 그리하여 로맨스와 멜로물에서 평등과 자유를 느끼고 싶다. 여성보다 우위에 서서 여성을 관찰하는 남성의 시선과 남성의 서사가 메인인 로맨스물이 아니라, 여성과 동등한 위치에서 소통하고 공감하며, 관계의 어그러짐에 울고 웃는 남성캐릭터를 보고 싶은 것이, 내가 '소년미'라는 글을 쓰는 주된 이유에 가깝다.
제작자들이 소년미가 잘 팔린다고 소년미로 유명한 배우에 몇십억을 써서 양산형 로코나 만들 것이 아니라, 섬세한 감정이 드러날 수 있는 플롯에 투자를 했으면 좋겠다. 여성의 시선과 남성의 시선이 동등하게 드러나는 시나리오가 채택이 되었으면 좋겠다. 캐릭터를 만드는 사람들이 남성캐릭터에 이런 섬세함과 투명함을 고려해주었으면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배우들이 이런 캐릭터를 선택해주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배우가 자신에게 들어올 작품을 선택할 권리가 100% 본인에게 있다고 믿는 것은 아니다. 연기도 되고 티켓파워도 있어야 다채로운 작품이 들어올 수 있을테니 자신의 배역을 선택할 수 있는 배우가 얼마나 되겠는가. 하지만 배우에게 선택권이 없는 것 또한 아니다. 작품하나가 빵 뜨면 다음해 작품 절반은 그 배우에게 대본이 간다는 인터뷰도 본 적이 있으니까. 다만 내가 바라는 것은, 섬세한 감정연기로 인기를 얻은 배우가 자신이 인기를 얻은 문화적 요소를 폄하하고 '남성성'이 강조된 작품으로 옮겨가는 선택만은 다시 생각해줬으면 하는 점이다. 자신의 투명함, 섬세함, 솔직함과 같은 매력을 알고, 그를 더 섬세하게 표현할 수 있는 작품을 선택해주었으면 한다는 점이다. 그런 한두번의 선택이 그 배우를 믿고 지지한 관객, 시청자들의 미시적인 공공선을 지켜줄지도 모르는 일이다.
2022. 12. 6
블로그글을 이사하면서 퇴고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