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을 준비할 때 보통 '장소'를 떠올린다. 어느 나라에 가서 어느 어느 장소를 방문하고, 그러려면 어느 장소에 머물러야 하는지, 어디를 먼저가고 어디를 나중에 갈 것인지 고민을 한다. 예약이 필요한 '장소'에 예약을 하고, 마지막에는 그 장소를 가기위한 동선을 검색한다. 구글맵에 쳐보고 캡쳐를 해두기도 하고, 중요한 것들은 프린트해서 오프라인에서도 볼 수 있게 준비한다. 그 모든 것들의 목적에는 장소가 있다.
어느 날 문득, 여행에 대한 기억이 떠오를 양이면, 신기하게도 기억은 길 어딘가를 헤매고 있다. 분명 그 길은 장소에 가기 위한 동선, 혹은 그 동선에서 길을 잃어 벗어나버린 실수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닐진데, 나는 그 여행의 인상이 그 골목 어귀에 박혀버렸다. 대구에서 막창이 맛있다고해서 막창집이 모여있는 골목을 갔다가 아는 곳이 없어 돌아나오던 길에 보이던 간판과 냄새와 색들이 하고많은 대구여행의 목적지들을 비집고 나와 대구여행의 지배적인 인상이 되었다. 벨파스트에서 유서깊은 펍에서 한잔하고 돌아오던 길에 택시를 부르고 기다리던 사람들, 그 사람들을 지나쳐 걸어가는 길에 맞이한 어둠, 어둠 속에 말걸던 위험한 무리들의 기억이 펍에서 마신 기네스생맥주보다 더 선명하다.
일본에서 살 때 환승이 안되는 문제로 나는 주로 신주쿠에서 내려 신오오쿠보역 쪽으로 걸어가곤 했는데, 그 길은 참 환장스러운 곳이었다. 사람이 엄청나게 많은 역을 뚫고 출구로 나오면 머지 않아 호스트들이 명함을 나눠주는 곳을 지난다. 호스트를 지나면 호스트 아닌 남자들이 난파(놀자고 꼬시는 것)를 거는 곳을 지나 큰 길을 건너는데, 그 건너에는 언제 그랬냐는듯 나지막한 단독주택들로 이어진 길이 있었다. 나는 그 길이 좋았다. 비슷비슷한 모양의 집들이 담은 각양각색으로 색칠해두고 또 서로 다른 모양의 화분들을 늘어놓고 있었다. 어딘가에는 빨래가 있고 자전거가 덧붙여지기도 하고, 모두 다른 삶의 도장을 찍어놓았다.
빅아일랜드를 갔던 기억은 내 생애 최고의 여행으로 몇 손가락 안에 드는데, 그곳에서도 일상적으로 떠오르는 기억은 아주 오래됐다는 원시숲도 아니고 가까이 가본 활화산의 열기도 아닌, 차타고 지나가며 본 풍경들이다. 원시숲을 보러가는 길에 가이드분은 차에 IZ(이즈라엘)의 노래를 틀어주었는데, 차밖으로는 그곳 주민들이 사는 집들이 낮고 또 넓게 이어져 있었다. 그 중에서는 현지의 벌레들 때문에 바닥을 띄워서 짓는다는 원주민 전통방식의 가옥도 있고, 미국식 가옥도 있었다. 하와이의 독립을 노래했던 이즈의 노래와 미국과 원주민의 문화가 섞인 풍경이 어우러지는 것이 참 아이러니하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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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삶의 목적은 소설을 쓰는 것이다. 소설을 쓰는 것은 '장소'같다. 그리고, 그 장소에 가면서 겪는 삶의 풍경들이 단지 소설을 쓰기위해 겪고 지나가는 영화의 조연같은 장면들로 치부할 수는 없는 것 같다. 학원 가는 길에 핸드폰으로 집바깥으로 늘어진 수국을 찍는다고 멈춰있다가 고개를 드니 내 뒤로 차가 세 대나 늘어서 있던 일본에서의 기억들. 아이와 학교를 가기 위해 집 앞 횡단보도에 서있으면 가까운 사거리의 파란불 신호를 놓치지 않기 위해 횡단보도에서 오히려 속도를 높이는 한국의 차들. 두 대비되는 기억이 나를 규제전공으로 이끌었다. 벨파스트에서 친했던 아이들이 해준 IRA, 스페인 북부 바스크와 남부 까딸루냐의 이야기들이 민족의식과 역사에 대한 주제로 나를 이끌었다. 삶의 풍경에는 목적과 수단이 없는 것 같다. 장면들에는 주연과 조연이 없는 것 같다.
내 삶은 느리게 느리게 모든 장면을 붙잡아가며 옮겨간다. 내 삶의 아주 작은 단역까지 발견해주고 싶다. 빅아일랜드에서 우연히 간 4일장의 애플바나나는 정말 환상적인 맛이었다. 태국의 어느 구멍가게에서 모든 제품이 일회용으로 낱개포장해서 파는 것들이 참 신기했다. 세부에서는 나가지 말라는 리조트 바깥으로 나갔다가 진창 바닥을 맨발로 다니는 남자에게 길거리통닭을 두배의 가격을 내고 사야했다. 맛은 기막혔다.
또다른 애플바나나와 길거리통닭이 내 인생의 어느 곳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을지 모르는 일이다. 모든 의미와 마주하고 싶다. 내 인생의 길목에서 마주하는 모든 의미들이 낱개포장된 것들을 하나하나 쳐다보며 발견하고싶다. 그것이 나를 실패한 사람으로 보이게 하더라도 말이다. 누군가는 그랬다. 자기는 한량으로 사는 것이 꿈이라고. 삶이라는 여행에 한량처럼, 지나가는 모든 풍경을 붙잡아 그림을 그리며 가자. 느리게 발자국 꾹꾹 누르며 가자.
2026.2.9
펍에서 잭콕을 시켰던 기억과 함께 여행이 가고싶어졌다
- 이름을 바꿨습니다.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