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얼굴> 리뷰
영화는 미스터리 장르에 알맞게 약간 어두운 화면으로 시작한다. 좁은 도장가게에 시각장애인이자 도장을 파온 장인인 아버지가 인터뷰를 하고 있고 그의 인터뷰를 따는 피디와 보조의 모습이 마주하면 보이지 않는 안쪽으로 아들 임동환이 아버지를 바라보며 서있다. 다큐라서 오래 진행되는 인터뷰에 아버지는 힘든 기색을 내비치고 아들은 그런 아버지를 변명한다. 아들이 아버지를 닮았다는 말에 아무런 반응이 없는 아버지를 대신해 그가 '당신 스스로의 얼굴도 모르므로' 그럴 것이라 이야기 한다. 아버지가 앞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그들 가족에게 어떤 의미였을지, 어떤 경험을 남겼을지, 보는 이들은 쉽게 가늠이 되지 않는다. 영화는 그렇게, 시각장애인 아버지가 잃어버린 과거이자 아마도 사랑이었을 어머니의 진실을 찾아가는 여정을 시작한다.
* 스포일러 주의! 본 리뷰는 영화 <얼굴>의 강스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1980년대 사람들이 가장 싫어하던 얼굴은 무엇이었을까. 지금도 완전히 끝나지는 않은 민주주의를 향한 길에 역행한 독재자를 만나 광주부터 전국적으로 민주화항쟁이 일어났으니, 아마도 전두환의 얼굴이 아니었을까? 아니면 지금처럼 일상 정치가 거대담론을 삼켜버린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처럼, 모두가 내심 각자 다른 것들을 싫어하고 있었을까?
요근래 혐오에 대해 사유해보면서 러스트벨트의 일부지역은 극우화하지 않았다는 언급을 한 적이 있다. 이 지역은 노동운동이 강성이어서 그 조직이 남아 여전히 마을을 운영하는 중요한 조직체로 기능했다. 노동운동조직은 언론이 전하지 않는 지역의 소식과 공장의 해외 이주, 이민자의 소식을 전했다. 그래서 분리전략에 휘둘리지 않고 이민자, 흑인, 여성보다 기업들의 행태, 국가의 정책 등이 그들 마을 쇠락의 원인임을 그들은 알고 있었다.
진실을 보는 눈이라는 것은 극우화 매커니즘의 중요한 '저항' 조건이다. 그 매커니즘이 완전히 밝혀지지는 않았더라도 타인의 삶에 관심을 가지고 제대로 알고, 언론이 물어다주는 편향된 정보에 휘둘리지 않으면, 불경기를 겪더라도 극우화하지 않는다. 극우세력이 보이는 혐오의 원인(사회변화)과 혐오의 결과(약자에 대한 폭력)가 단순히 생각해보더라도 쉽게 인과관계가 성립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단순한 사유를 하느냐, 하지 않느냐는 내가 혐오에 물드느냐 물들지 않느냐를 결정하는 요인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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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얼굴>에서 나타나는 '정영희'를 향한 감정을 보자.
제일 처음 등장한 정영희의 언니들. 언니들이 처음으로 영희의 얼굴을 '못생겼다'고, 괴물같다고 증언하며 정영희를 싫어한다. 그들이 정영희를 싫어하는 이유는 그녀가 아버지의 바람을 어머니에게 이야기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조금만 들여다보면 그들의 분노는 아버지에게 향해야 맞다. 아마도 경제적인 이유, 사회적인 이유 때문에 아버지에 대한 비난은 암묵적으로 비밀이 되고, 어머니를 비롯한 영희의 자매들은 영희가 거짓말을 했고, 영희가 패물을 가지고 도망쳤으며, 그녀는 못생겼다고 영희를 비난한다. 아버지의 바람에 대한 증거도 없지만 영희가 거짓말을 했다는 증거도 없다. 그러니 그녀는 못생겨야 한다. 그래야 '이유없는' 정영희에 대한 미움이 주변에 타당해 보일 수 있기 때문이다.
두번째 방직공장의 노동자들. 그들은 일하다가 시간이 없어 화장실을 못 가 그대로 바지에 똥을 지린 정영희를 '똥걸레'라 부르며 조롱한다. 그들이 비웃고 화내야할 것은 화장실이 하나 밖에 없는 열악한 환경을 주고, 쉬는 시간도 없이 일을 시키고, 충분한 인력을 내어주지 않는 사장이어야 한다. 하지만 사장을 조롱하고 비판했다간 자신들이 힘들게 얻은 일자리가 날아갈 판이다. 그러니 잘못한 것은 정영희여야 한다. 똥을 지린 것을 놀리는 데 대한 죄책감은, 이들에게도 여전히 '정영희가 못생겨서' 희석된다.
세번째 성폭행피해자. 그나마 그녀는 당시엔 아니었어도 지금은 자신의 잘못을 깨닫는 유일한 인물이다. 당시엔 강간한 사람에겐 화도 못내고 그걸 주변에 알리고 의제화한 사람의 뺨을 때린다. 그리고 이 사람은 정영희가 못생겼다고 말하지 않는다.
네번째 방직공장 사장. 이 사람은 KKK 뒤에 있었던 미 민주당 같은 존재다. 국정원 뒤에 있었던 이명박 같은 존재. 이 사람이 방직공장의 환경을 열악하게 만들고 여성 노동자를 강간하고 사진을 찍어 모든 문제의 원인이 된다. 자신을 향하는 손가락의 방향을 돌리고자 '피해자'인 척 하고 방직공장의 노동자들을 시켜 정영희가 전단지를 돌리지 못하게 한다. 자신을 향하는 분노의 방향을 돌려 정영희를 향한 혐오로 기능하게 만든 사람이다.
다섯번째 임영규. 임영규는 어려서부터 눈이 보이지 않았던, 어찌 보면 정영희보다 더 '사회적약자'라는 이름에 어울리는 사람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괴롭힘을 당하고 무시를 당했기에 그에 대한 억울함과 분노가 가슴 속에 있다. 그런 그가 아내를 결국 죽이는 데 이르기까지, 분노가 혐오로 변하는 매커니즘을 정확하게 보여주는 모순이 있다. 자신이 사회적 약자임에도 다른 사회적 약자에 폭력을 휘두르는 그의 모습은 일견 이해가 가지 않는다. 하지만 그는 물리적인 눈 뿐 아니라 마음으로 진실을 바라보지도 못하는 인물로 그려진다.
그는 진실을 보지 못하고 남이 하는 말만 듣고 정영희를 높이 평가했다가 역시 남이 하는 말만 듣고 정영희의 가치를 낮게 평가한다. 자신에게 괄시와 무시를 행하는 사람은 정작 사장과 같이 다른 사람들이고 그 사람들은 임영규의 물건을 제값을 주고 사지도 않고 임영규를 높이 평가하는 척 조롱을 일삼는데, 임영규는 그에 대한 분노를 고스란히 마음 속에 삭혔다가 정영희의 탓으로 돌린다. '자신이 못생긴 여자와 결혼을 했기 때문에 그들이 그렇게 괄시를 하는 것'이라는 말도 안되는 생각으로 말이다. 그리고 정영희는 스스로의 얼굴에 대해 말한 적이 없음에도 정영희가 자신의 외모를 속였기 때문에 이 모든 일이 일어난 것이라 믿는다. 그래서 그는 정영희에게 벗어나기로 결심한다. 정영희는 어느새 그가 받는 '괄시' 그 자체가 되었기 때문이다.
장례식장에서 정영희의 얼굴은 빈 채로 있다. 그녀의 얼굴은 일종의 혐오가 그려지는 빈 캔버스 같다. 이 시대의 사회적 지위가 하락하거나 하락할지도 모른다고 공포감을 가진 사람들이, 사회를 향해야 할 분노의 방향을 돌려 사회적 약자를 향해 뿜어내는 혐오의 그림이 그려지는 공간. 그래서 그녀가 약하고 아무런 잘못이 없는데도 그녀에게 향하는 폭력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그녀는 그녀를 향하는 '감정 그대로 혐오스럽게 생겨야만' 했던 것이다.
나중에 밝혀지는 사진에는 공장의 열악한 환경도, 사장의 욕심 가득한 얼굴도 아닌, 그저 평범한 여자의 얼굴이 그려져 있다. 진짜 혐오스러운 얼굴은 피해자의 나신으로 가득한 골방에서 소변을 흘리며 누워있는 사장의 얼굴일 것이다. 관객은 죽은 아내를 시원한 표정으로 가져다 버리고 있는 임영규의 얼굴이 정말 혐오스러운 얼굴임을 모두 목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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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1980년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여느때보다도 생활정치가 혐오에 물들어버린 오늘날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 옳음, 공공선, 사랑, 정의 같은 것은 돈이 많을 때 생기는 여유의 일종일 뿐 실제 삶에는 내 돈, 내 명예, 내 성공만이 중요하다. 나라를 좀먹어가는 전두환에 관심가질 겨를도 없이 시야가 극도로 좁아져서-마치 앞이 보이지 않는 것처럼- 진실을 보지 못하고 내 명예, 내 돈, 내 지위를 잃게 할 수 있는 내 잘못을 남에게 치우는 데 급급하다. 내 돈을 빼앗아갈 수 있는, 내 직장을 위험하게 할 수 있는 사람이 공공의 적이고 미운 사람이다.
그래서 분노해야할 곳을 돌려 만만한 사람을 자신의 분노의 원인으로 몰아넣고, 폭력을 가한다. 폭력의 대상이 사회적 약자여도 상관없다. '내'가 그들보다 더 약하고 그들보다 더 피해입었고, 무엇보다, 내가 그들보다 더 잘못이 없다고 여기니까. 모두가 입을 모아 '정영희가 못생겼다'고 증언하는 것처럼, 그들은 말한다, 장애인이 지하철에서 시위를 한 것부터가 잘못이라고. 여자가 결혼 대신 자신의 일을 하려고 하는 게 문제라고. 그러니 '내'가 그들을 때리고 착취영상을 찍고, 결국은 살인까지 하더라도 '내' 잘못은 없다고.
하지만 비어있는 캔버스에 그리는 정영희의 얼굴이 결국 그들 자신의 추악한 진실만을 보여주었듯, 근래 2-30대 남성이 여성을 향해 보이는 일방적 혐오는 남성이 과거 여성에게 가졌던 우월한 지위, 우월한 시선을 그대로 유지하고 싶은 그들의 그릇된 욕망만을 비추는 거울이다. 일부 언론은 지금 시대가 혐오의 시대이고 마치 2-30대 전체가 혐오에 물든 세대인양 거룩하게 논평기사를 써내지만, 이 영화는 분명히 전하고 있다. 혐오의 주체가 가진 그 감정 그대로의 더러움을. 혐오는 2-30대 남성층의 문제이고 그들의 그릇된 욕망이자 그들의 비겁함이다.
2025.9.15
이번주 <이이이, 한국의 문제들>은 관련된 리뷰를 토막글로 담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