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우세력 미시적으로 바라보기
* '나'의 이름은 -3에서 이어집니다. https://brunch.co.kr/@sosorap/92
급변하는 현대사회 속에서 기든스가 말하는 자아정체성은 온갖 위험에 노출된다. 자아정체성을 유지해나가기 위해 개별자는 서사를 통해 끊임없이 성찰하면서 자아정체성을 구성해나간다*. 그것은 사회의 구조적 영향을 인정하는 한편, 현대사회가 구조적으로 자아정체성을 강제하지 않음을 분명히 한다.
미국 러스트벨트의 노동자 계층은 전통적인 산업구조의 재편과 세계화가 초래한 경제적 불안정이라는 위협을 마주했다. 대부분의 지역은 기든스가 말하는 '자기 성찰적 서사'를 통해 자신의 삶을 재구성하기보다 과거의 '백인 남성 노동자'라는 전통적 서사를 끌어와 정체성을 보완했다. 이들에게 중요한 것은 '새로운 경제 질서 속에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라는 성찰적 질문이 아니라, '나와 내 지역이 한때 누렸던 지위를 되찾을 수 있는가'라는 지위 불안이다. 이는 곧 기든스가 말한 존재론적 불안—즉 '내 삶이 계속해서 의미 있고 안정적으로 지속될 수 있는가'라는 근원적 불안—이, 지위가 추락할지도 모른다는 공포로 전치된 형태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불안은 성찰적 서사로 풀리지 못하고, 미 공화당이 제공하는 단순한 적대 구호로 대체된다. '이민자와 소수자가 너희의 일자리를 빼앗았다'는 메시지는 구조적 불평등이나 탈산업화라는 거대한 문제를 외면하게 하고, 불안의 원인을 외부 집단으로 돌리게 만든다. 기든스적 관점에서 이는 개인이 자기 삶을 성찰적으로 스스로 '서사'를 완성하지 못한 채, 외부가 제공한 단순화된 적대 서사 속에 흡수되는 전형적인 양상이 되는 것이다.
구체적 사례를 보아도 마찬가지다. 제조업 일자리 감소와 지역 공동체 붕괴는 세계화와 자본 이동이라는 구조적 문제임에도, 극우 담론 속에서는 '이민자들이 일자리를 빼앗았다'는 단순한 이야기로 환원된다. 의료·주거 불안 역시 제도 개혁으로 이어지지 않고, '소수자에 대한 특혜'라는 불만으로 전치된다. 과거 ‘번영했던 미국’에 대한 향수 또한 미래의 대안을 모색하는 성찰적 동력이 되기보다, '백인 남성 중심 사회로의 회귀'라는 퇴행적 내러티브로 재해석된다.
극우세력은 극우세력으로 태어나지 않는다. 그들이 가진 분노는 사회를 향할 수도 있고 내면으로 향할 수도 있으며 -지금 그들의 모습처럼- 사회적 약자를 향할 수도 있다. 그 향방을 조건짓는 것은 그들이 스스로 정한 그들 스스로의 성찰이다. 극우세력 속 개별자의 개인적 불안은 제도 개혁이나 경제 민주화로 이어지지 못한 채, 인종적 혐오와 정치적 급진화라는 집단 감정으로 치환되었다.
스스로를 잠식하는 불안을 스스로 성찰하지 않고 자신의 욕망을 채워주는(지위를 올려주는) 극우 정치의 논리로 채운 결과, 그들은 사회적 약자를 태연하게 공격하는 범죄자 집단이 된다. 그들의 혐오는 그들의 비뚤어진 욕망을 그대로 전시한다. 사회적 약자는 커녕 타인에 대해 사유하지 않고 그들보다 우위에 서고자 하는 그들의 욕망을 그대로 투영한다. 그들의 혐오는 그들의 정체성 그 자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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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부 언론은 지금 시대가 혐오의 시대이고 마치 특정 지역이나 세대가 혐오로 뒤덮인 양 거룩하게 논평기사를 써내지만, 혐오는 그 주체의 문제다. 정치와 언론과 극우세력은 혐오로 인해 발생하는 문제의 공동불법행위를 구성한다. 그들은 사회에 대해 각각 전부를 -부진정연대채무를 지는 자들이다. 정치와 언론의 책임이 드러난다고 하여 극우세력이 그들에게 마냥 휘둘린 피해자가 되는 것이 아니다. 극우세력은 그들 자신을 위해 사회적 약자를 해치는 것도 서슴치 않는 -마치 아이히만처럼- 사회의 학살자가 된 사람들이다. 혐오는 그들의 욕망으로 탄생해 사회를 제 눈으로 스스로 볼 줄 모르는 사유의 무능의 매커니즘을 통해 폭력으로 재생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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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을 보는 눈이라는 것은 극우화 매커니즘의 중요한 '저항' 조건이다. 그 매커니즘이 완전히 밝혀지지는 않았더라도 타인의 삶에 관심을 가지고 제대로 알고, 언론이 물어다주는 편향된 정보에 휘둘리지 않으면, 불경기를 겪더라도 극우화하지 않는다. 극우세력이 보이는 혐오의 원인(사회변화)과 혐오의 결과(약자에 대한 폭력)가 단순히 생각해보더라도 쉽게 인과관계가 성립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단순한 사유를 하느냐, 하지 않느냐는 내가 혐오에 물드느냐 물들지 않느냐를 결정하는 요인이 된다.
현대사회의 불안 앞에 '나'는 끊임없이 물어야 한다. 타인에 대한 끊임없는 단정을 버리고 그 에너지를 자신으로 돌려 나를 성찰하며 질문해야 한다.
나의 이름은 무엇이냐고
나의 분노는 어디에서 오는 것이냐고. 나는 그 분노를 어디를 향할 것이냐고. 그리하여 일상의 정치에서 나의 이름은 무엇으로 규정될 것이냐고.
나는 내 분노를 정확히 들여다보고 사회에 그 분노를 교정할 방향으로 뛰어들것인지, 분노를 이용하는 세력이 지정해주는 방향을 따라 이리저리 칼을 휘두를 것인지, 스스로 결정해야한다. 급변하는 현대사회에서 내 지위가 추락할지도 모른다는 불안을 제도 개혁이나 경제 민주화를 통해 해결해 나갈 것인지, 아니면 혐오와 정치적 극우화로 바꾸어 폭력으로 해결할 것인지, 나는 스스로 결정해야 한다.
2025.9.27
'나'의 이름은 완결
* 앤소니기든스, <현대성과 자아정체성>, 52-133 요약정리
- 앤소니기든스도 잘 알지 못해 읽고 정리하느라 업데이트가 늦었습니다. 죄송합니다.
- 2주 쉬고 추석이 지나고 한국정치에 대한 이야기로 뵙겠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