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여름을 무척 좋아하는 사람이다. 덥고 지치기도 하지만 어느 계절보다도 나는 여름에 항상 에너지가 넘치고 살아있음을 느낀다. 내 모든 감각의 문이 활짝 열리는 계절이랄까. 하고 싶은 것이 많고 그래서 움직임이 많아지고 그로 인해 느끼는 감정과 감각의 폭도 최대치가 되는 계절. 특히 땀에 흠뻑 젖은 몸을 찬물로 싹 씻어내고 에어컨이나 선풍기 바람 앞에 앉으면 녹초가 됐던 상태 덕분에 상대적으로 더 극적인 상쾌함을 느낄 수 있다. 매미가 우는소리. 이글이글 땅에서 올라오는 아지랑이. 초록 초록 잎사귀가 가득 찬 나무와 식물들. 한껏 선명해진 세상의 컬러들. 나에겐 1년 중 여름의 시간이 가장 귀하다. 여름이 오면 반가움과 동시에 금방 흘러갈 이 소중한 시간이 아쉽다.
나는 만 나이로 20대 마지막 여름을 막 보내고 있었다. 그는 여름을 좋아하지 않았다. 몸에 나보다 열이 많아서 땀이 많이 나니까 싫다고 했다. 우리는 겨울과 봄 여름을 순서대로 지나고 있었는데 돌이켜 생각해 보면 나에겐 그가 싫어하던 여름의 기억이 가장 선명하다. 그래서 내가 좋아하던 계절이 드물게 아픈 시간으로 남아있다. 앙상한 나뭇가지에서 싹이 돋고 무르익어 푸릇푸릇하게 선명해져 가던 그해 여름. 나는 정말 오랜만에 사랑 때문에 속앓이를 했다. 10년도 더 된 과거에 경험한 풋풋했던 사랑앓이를 다 큰 성인이 되어서 또 겪을 수 있다니.
나의 모든 것을 보듬어주고 위해주었던 그 귀중한 마음이 무더운 여름날 장맛비와 함께 식어가고 있었다. 영원할 줄 알았던 것이 갑자기 변해버렸고 그것을 알아챘을 때 순간적으로 느껴지던 아린 감정을 감당하기 버거웠다. 끝까지 모른척하고 싶었다. 잠시 더운 계절에 짜증이 난 것일 뿐이라고 그럴 리가 없다고. 본인도 본인의 마음이 변한 것을 모른 채 어쩌면 평소대로 나를 대하고 있었을지도 모르니까. 하지만 그 계절엔 미세한 균열마저도 너무나 선명하게 보였고 내 가슴은 시리게 아팠다. 여름이 아니었다면 그 균열은 금방 다시 붙어서 없던 것처럼 사라질 수도 있었을까?
우리는 노래 부르는 것을 좋아했다. 자주 동전 노래방에 가서 시절을 담은 가슴 절절한 사랑 노래들을 부르곤 했다. 사실 그때까지는 노래 가사들이 내 얘기가 될 줄 몰랐다. 가사는 귀에 들어오지 않았고, 오직 멜로디만을 음미하던 나였다. 가을이 되고부터는 멜로디보다 가사를 더 곱씹을 수 있게 됐다. 여름이 지나가고 기분 좋은 바람이 불기 시작했는데 옆에 그가 없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어쩐지 쓸쓸한 바람으로 느껴지기도 했다. 퇴근 후 혼자 동전 노래방을 가는 것이 습관이 됐고 노래를 부르지 않고는 집에 들어가기가 힘들었다. 백예린의 ‘아마 그건 우리의 잘못이 아닐 거야’를 노래방에 갈 때마다 불렀다. 그에게 불러줬더라면 참 잘 부른다고 칭찬해 줬을까? 그리고 우리는 그 균열을 어쩌면 대수롭지 않게 넘기고 이 좋은 계절을 함께 맞이할 수 있었을까?
나는 운명의 흐름 앞에서 꽤나 수동적인 사람으로 바뀌었다. 과거에 갑작스럽게 교통사고를 당한 적이 있었는데 그 후로 나약한 인간의 힘과 의지로는 어쩔 수 없는 영역이 있다는 분명한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인정하기 싫고 인정할 수 없지만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 하는 사실이었다. 내 곁에는 더 이상 그가 없다. 그래서 지금도 생각한다. 그때 그 작은 균열이 아니었어도 언젠가 우리는 어찌 되었든 결국 남남이 됐을거라고. 사실 인정하기까지 많은 시간이 걸렸다. 겨울이 오고 춥디추웠던 내 생일날이 지나고 난 뒤에야 정말 느리게 그에 대한 기억이 희미해져 갔다.
또다시 여름이 돌아왔다. 눈부신 햇빛과 선명해진 초록 나무 잎새들도 어김없이 찾아왔다. 계절은 선명해졌는데 2년 전의 기억은 이제 흐릿하다. 제법 다시 즐길 수 있게 된 여름 냄새와 함께 문득문득 그때의 흉터가 희미하게 남아 있는 것이 느껴지곤 한다. 참 감사한 일이다. 덕분에 내가 좋아하는 여름의 매력이 더 다채로워졌다. 남들은 알 수 없는 추억과 기억들이 여름을 음미하는 나의 감각을 더욱 풍요롭게 한다. 당시에는 잘 몰랐던, 누군가를 정말 많이 좋아했던 마음을. 그래서 행복했고 또 아팠던. 지금은 꼭 안아주고 싶은 그해 여름의 나는 어느새 또 새로운 여름을 맞이한다.
동전 노래방에서 노래를 마치고 집에 가기 위해 지하철역 근처로 나오면 우리가 처음 만났던 카페 자리가 있다. 같은 장소지만 처음 만났던 날과 헤어짐을 고민하기 위해 만났던 날은 각각 다른 이름의 카페였다. ‘완전 끝’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인 후 근처에 다시 갔을 때는 아예 임대 딱지가 붙어있는 상태였다. 시간이 흐르면서 영원한 건 없고 사라질 것은 사라진다. 순간의 좋은 기억만이 앞으로 남아있는 시간들을 유의미하게 만들어 줄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