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다 이야기
몇 해 전부터 엄마는 자꾸 ‘또 그 시간이야, 그 시간’이라고 했다. 그때마다 들여다본 엄마의 얼굴은 달아올라 벌겋고, 콧잔등엔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혔다.
생리는?
이제 안 하지.
엄마는 평생 직접 만든 면생리대를 썼기에 완경이 되면 기뻐할 줄 알았다. 그런데 덤덤했다. 하긴, 그게 뭐 별거라고. 생각해본 적도, 알아보려 한 적도 없는 갱년기. 때문에 그 시기를 보내는 엄마도, 곁에서 엄마를 지켜보는 나도 낯설었다. 하지만 태어나면 자라고 늙는 것이 자연스러우며 어찌 보면 우리는 매 순간 늙고 있으니 대수롭지 않았다.
이 영양제 먹고 생리를 다시 한 사람이 있대.
오랜만에 만난 엄마는 여전히 몇 분 간격으로 손부채질을 했다. 그러면서 가방에서 작은 팩을 꺼냈다.
이걸 먹고? 근데 엄마는 생리하는 게 좋아? 아프고 게다가 생리대 빨고 말리고 다리고 정리하는 거 귀찮잖아?
늙는 게 싫어.
엄마는 얼굴에 내려앉은 주름이 야속해 거울을 보지 않는다고 했다. 사람들이 무심하게 ‘전 더 나이 드신 줄 알았어요~’ 하면 매너 없는 사람이라며 화를 냈다. (물론 나도 그렇게 여긴다. 타인의 외모에 대한 발언은 무엇이든 처단한다.) 한 번은 도저히 안 되겠다며 시술을 받았다, 시간이 지나면 효과가 다 사라지지만 잠깐은 젊어지니 괜찮다면서.
엄마가 왜 그렇게 노화를 싫어하고, 젊음에 연연하는지 곰곰 생각했다. (여자는 언제나 자신이 20대에 머물길 바라고, 조금이라도 어려 보이길 바라며 여자 나이 30대부터는 여자가 아니라는 등의 저급하고, 허접하며 단순한 정의 역시 처단한다.) 더불어 생리가 ‘젊음’의 비유 중 하나인 이유는 무엇인지 고민했다.
외할머니는 자주 말한다, 늙으면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어. 하나도 쓸모가 없어.
아무도 날 찾지 않고, 누구도 날 필요로 하지 않으며 나이가 나의 한계가 되는 건 쓸쓸하다. 그래서 세상이, 사회가 나의 표면적인 어떤 부분으로 나의 능력치를 판단하는 건 서럽다. ‘나이 듦’이 단순히 ‘나이를 먹었다’가 아니라 ‘늙어서 쓸모없다’로 읽히게 된 건 비논리적이다. 뒤늦게 고등학교를 다니고, 대학을 다닌 엄마기에 그런 점들을 분명 피부로 느꼈을 것이다. 그럼 노화를 싫어하고, 젊음을 추구하는 심정이 이해가 된다. 생리를 하면 ‘진정한 여자 됨’을 축하하는 사회에 사니 ‘완경’되면 여자가 아닌 동시에 본인을 늙었다고 자각하는 것 역시 충분히 이해된다.
엄마가 어디에 주름이 또 늘었다, 누가 내 나이보다 5살은 더 늙어 보인다고 했다 등등 얘기할 때마다 어떤 말을 내뱉어야 할지 머릿속으로 고르고 또 고른다. 그런데 결국 아무 말 못 한다. 하지만 엄마가 요리를 하고, 무언가를 만들고, 가꾸고, 새로운 걸 배울 때 꼭 말한다.
엄마, 정말 맛있다! 이걸 엄마가 만들었어? 역시 우리 엄마야! 솜씨가 여전하시군요! 나 이런저런 것 좀 만들어줘! 사려고 했는데 엄마 솜씨 따라가는 게 없어! 그런 걸 배웠어? 나 그거 모르는데 엄마 정말 대단하다!! 나도 좀 알려줘!
-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