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이니까 얇고, 가볍고, 시원한 옷

하다 이야기

by 오늘

내 옷장에는 여름옷이 많다. 제일 많다. 아마 석 달 동안 매일 다른 옷을 입어도 겹치는 날이 없을 것이다. 이토록 여름옷을 좋아하는 이유는 비교적 저렴하고, 알록달록하며 가볍기 때문이다. 올여름은 다른 때보다 이르고, 길다는 예보를 구실로 삼으며 쇼핑을 시작했다. 통장 잔고 생각 안 하고 일단 장바구니를 채웠는데 문득 작년 이맘때 했던 고민이 떠올랐다. 여름옷을 구경할 때마다 무수히 품었던 의문도 함께 떠올랐다.


이 옷을 생리할 때도 입을 수 있을까?


쇼핑몰을 훑어보고, 장바구니에 물건을 담았다 덜어내길 반복하면 점점 즐거움은 사라지고, 걱정이 차오른다. 더위를 많이 타고, 두피부터 발바닥까지 땀을 줄줄 흘려서 무조건 ‘시원한 소재로 만든 시원한 옷’ 위주로 고른다. 그런 옷은 당연히 얇다. 아이스커피를 마시다가 얼음이 녹은 물 한 방울만 흘려도 금방 동그랗게 젖는다. 빨리 마르지만, 흔적은 남는다.


생리할 때 그런 옷을 입으면 시원하기는 하다. 생리 중엔 체온이 확확 오르니까. 그러나 언제 생리혈이 새서 얇은 옷을 적실지 몰라 불안하다. 수시로 뒤를 돌아 확인하고, 창에 뒷모습을 비춰본다. 그러고 싶지 않아서, 만약을 대비해서 속바지를 입는다. 속옷을 입고, 속바지를 입고, 얇은 겉옷을 입고 거울을 보면 그런 생각이 든다.


이러려고 얇고, 시원한 옷을 샀던가.


그래서 ‘여름에 생리할 때’ 그나마 안심할 수 있는 옷을 따로 산다. 자칫 생리혈이 새서 곤란한 상황이 생기더라도 최대한 티 나지 않는 옷, 속바지를 입어도 티 나지 않는 옷으로. 거기다 통장이 허락하고, 가지고 있는 옷과 잘 어울리고 어쩌고 저쩌고 이러쿵저러쿵 따지기 시작하면 세상에서 제일 즐거운 일 중 하나인 ‘쇼핑’이 짐처럼, 과제처럼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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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말하지만 나는 여름옷을 좋아한다. 여기에서 ‘나’란 ‘생리하지 않는 나’를 가리킨다. 생리하지 않는 나는 옷에 생리혈이 샐 일도, 생리혈이 묻을까 걱정할 일도 없다. 마음에 드는 여름옷을 통장이 허락하는 선에서 구매해서 시원하게 입으면 된다. 하지만 ‘생리하는 나’는 액체인 생리혈이 옷에 스밀까 전전긍긍한다. 그런 상황을 방지하려고 ‘생리 맞춤옷’을 찾다가 결국 아무것도 사지 못하고, 미래의 나에게 ‘쇼핑’을 미루고 미루다 결국 그냥 낡은 옷을 입는다.


괜찮다. 옷이 아예 없는 건 아니니까. 하지만 행여나 생리혈이 새서 옷에 묻을까 남의 눈치 보고, 칠칠하다는 소리 들을까 또 남의 눈치 보는 게 싫다. 그 ‘남의 눈’ 때문에 괜한 소비를 하는 것도 싫다. 왜냐고?

누가 다쳐서 옷에 피를 흘리면 안타까워하지만 누군가의 바지에 생리혈이 묻은 걸 보면 역겨워하고, 조롱하는 사회의 분위기가 ‘기이하다’ 생각하니까. 생리야 말로 ‘내 뜻대로 안 되는 것’ 중에서 최상위권에 속하니까.


-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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