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리라는 짐, 생리가 주는 짐

하다 이야기

by 오늘

이모 댁에 가는 날이었다. 어릴 때부터 들고 다니던 헬로키티 틴케이스에 짐을 챙겼다. 손잡이가 달린, 빨간 틴케이스는 크기가 A4용지와 비슷했다. 어디에 갈 땐 거기에 인형(이제는 기억 나지 않는 내 친구), 지우개(당시 미니어처 지우개를 모으는 것에 매우 열광했다), 수첩 그리고 필통을 담았다.


이모 댁에 가는 날 생리가 시작되었다. 계절은 여전히 아름다웠고, 더웠으며 모든 색이 선명했다. 헬로키티 틴케이스는 오래 사용해 빛이 바랬지만 이보다 더 좋은 여행 메이트는 없었다. 한손에는 틴케이스, 다른 손에는 엄마손을 잡고 이모 댁으로 향했다. 그런데 집에서 출발하는 그 순간부터 내 뒷모습이 오리가 되었다. 보지 않았지만, 느껴졌다. 디즈니 만화동산에서 봤던 그 오리의 뒷모습과 내 뒷모습이 머릿속에서 겹쳐졌다. 먼 길을 가야 해서 오버나이트 생리대를 찼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그 시절의 생리대는 두껍고, 두꺼웠으며 두꺼웠다. 여행을 위해 틴케이스와 짝을 맞춰 옷도 입었는데… 그 상태로 버스, 고속버스 다시 버스를 타고 조금 더 걸어 이모 댁에 도착했을 때 미간에는 주름이 쩍쩍쩍, 입도 오리처럼 툭 튀어나왔다.


내가 움직이면 생리대는 자동차의 와이퍼처럼 움직였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때는 피부가 훨씬 더 약하고, 예민했다. 생리대가 좌우로 움직이면 스친 부분은 다 빨개지고, 심한 곳엔 염증도 생겼다. 여름엔 생리대 때문에 땀띠까지 나서 하반신이 활활 불타올랐다. 가려우면 피를 볼 때까지 박박 긁는 습성이 발동해 불타는 하반신을 긁다가 엄마한테 여러 번 혼났다. 이런 상황을 평생 몰랐다면 좋았을 텐데. 모르고 싶었는데. 하필! 이모 댁에서 하룻밤 자고 오는 동안 제대로 알게 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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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다니며 관찰하고, 구경하면서 상상하는 걸 좋아한다. 그걸 바탕으로 혼자 이야기 만드는 걸 즐긴다. 여행은 이 조건을 충족하기에 좀 멀리 나가는 건 나에게 다 ‘여행’이 되었고, 더 많은 이동과 관찰과 상상을 소망했다. 그런데 생리를 하게 된 후 여행은, 나에게 여행의 의미는 바뀌었다.


오전에 만나서 밤에 헤어져도 아쉬운 친구와의 만남도 PMS기간과 생리기간을 피해 정하는 게 필수다. 친구와 나의 ‘그’기간이 같으면 다행이지만 다를 경우 나의 PMS+생리기간이 지난 후 친구의 PMS+생리기간이 다가오면 만남은 영영 멀어진다. 여행? 생리 예정일까지 며칠 남았는지, 거기에 따라 PMS기간은 언제부터 언제까지이며 생리 예정일을 알려주는 어플이 지금까지 정확했는지, 만약 여행 날짜와 생리가 겹친다면 언제부터 피임약을 먹을 것이며 만약 약효가 없어서 여행 갔을 때 생리가 시작했을 경우를 대비해서 여행 루트를 유동적으로 짜고! 생리가 샜을 경우에도 비교적 안심이 되는 옷을 챙겨야 하는데 그런 옷이 없다면 또 사야 하고! 하… 난 여행이 좋다. 여전히 좋아한다. 그런데 생리를 하게 된 후엔 여행이 주는 ‘행복한 감정’을 생리라는 거대한 돌이 누르는 장면이 연상된다. 무엇보다도 생리할 땐 방에서 화장실에 가는 것조차 싫다. 원룸에 사는데 그렇다. 그 작은 집에 사는데도 그렇다.


헬로키티 틴케이스를 들고, 더 많은 이동과 관찰과 상상을 소망하던 나는 이제 어디 한 번 가려면 ‘생리가 주는 만약’을 대비한 짐 한아름 짊어지고, ‘생리로 인한 변수’ 여럿을 상상해야 함을 알기에 쉬이 ‘떠나자! 여행 가자! 유룰리히!’ 하지 못한다. 나와 다른 여성도 있겠으나, 초경 이후 생활의 많은 부분 앞에 ‘생리’를 두게 됐다. 그러니까 정확하게는 생리 때문에 짐과 생각해야 할 것이 많아진 게 아니라 ‘생리’ 자체가 이미 커다란 짐인 것이다.

날이 좋은데 또 창밖만 보고 있다. 여행 가고 싶은데, 가고 싶지 않기도 하다.


-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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