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다 이야기
고전소설을 즐겨 읽는다. 좋아해서라기보다는 일종의 강박이다. ‘작가’가 되려면 양질의 작품을 읽어야 하고, 지금 세상에 나오는 작품은 고전소설의 변주라고 배웠다. 그래서 읽는다. 읽고 또 읽다 보면 ‘작가’가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헛된 희망 때문이기도 하다. 훌륭한 작품을 읽는 것만큼이나 습작도 중요한데 쓰는 건 전~혀 하고 있지 않으니까.
아직도 그 날을 기억한다. 퇴근 후 집에 돌아와 씻고, 책장에서 아무거나 골라 스탠드 불빛 아래에서 펼쳤다. 프란츠 카프카의 ‘변신’이었다.
어느 날 아침, 그레고르 잠자는 불안한 꿈에서 깨어나자 자신이 침대 속에서 한 마리의 흉측한 벌레로 변해 있는 것을 발견했다.
- 프란츠 카프카 ‘변신’. 범우비평판세계문학선 19-2. 박환덕 옮김.
첫 문장을 읽은 후 소설 속으로 끌려들어갔다. 그 외는 기억 나지 않는다. 마치 내 인생의 어느 부분에 ‘프란츠 카프카의 변신’ 구간이 있고, 거기에 풍덩 빠진 것 같았다. 그때부터 누군가가 가장 좋아하는 작품을 물으면 ‘변신’이라 답한다. 이유를 물으면 ‘글쎄요’라고 답한다. 내가 가진 협소한 단어로는 표현할 수 없다. 이 글을 쓰는 지금도 ‘변신’을 왜 이토록 좋아하는지 모르겠다. 그래서 자꾸 보고, 더 생각하고, 많이 찾는다.
주인공 그레고르 잠자의 인생은 사람일 때와 벌레일 때로 나뉜다. 소설은 벌레로 변한 시점에서 시작해서 벌레인 채로 죽는 것까지만 얘기한다. ‘그레고르 잠자’로서가 아닌, 누군가의 아들과 오빠로 살아가야 하는 책임을 가진 사람이었을 때의 모습은 독자의 상상에서만 존재한다. 자고 일어나니 벌레가 되어있던 잠자는 이제 타의로 돈을 벌 필요도, 피곤하게 여기저기 다닐 필요도, 원치 않는 곳에 몸을 뉘일 필요도 없는, 그토록 바라던 삶을 살게 되었다. 자신을 짓누르던 부모님의 빚과 챙겨야 할 동생에게서 벗어난 것이다. 반면 가족에겐 ‘필요한 사람’에서 ‘경멸의 대상’으로 바뀌어 방에 갇히고 말았다.
가족을 위해 살 때 나름 행복했을지도 모른다. 벌레가 되어 격리됐을 때도 조금은 행복했을지도 모른다. 헌데 두 삶 중 그레고르 잠자가 온전히 자신의 선택대로 살고, 원하는 방식으로 행복을 찾은 경우는 없다. 가족이 만든 환경, 세상(?)이 만든 상황에 자신을 끼워 넣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 자기 마음대로 사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 하고 싶은 거 다 하면서 사는 사람 또한 어디 있겠어. 나름의 책임과 꿈을 갖고 절충하며 살겠지. 그런데 ‘쓸모’나 ‘필요’가 없어졌다고 해서 버려지고, 외면당하는 일은 없었으면 한다. 지구에 불쑥 떨어져 언어를 익히고, 관계를 맺고, 인생을 배우는 것만 해도 대단하잖아. 세 개 다 못해도 괜찮아. 오늘을 살아내는 것만 해도 충분히 대단하잖아. 사람이 소모되고, 소모되다가 쓸모를 잃으면 버려지는 소모품도 아니고. 무엇보다도 ‘사람’과 ‘쓸모’와 ‘필요’가 한 데 묶이는 것 자체가 오류 아닐까.
다 차치하고 ‘변신’이나 또 읽어야겠다.
-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