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집에 흐르는 계략

하다 이야기

by 오늘

우리집엔 계략이 흐르고 있다. 확신한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럴 수 없다.


아무 생각없이 샤워를 하러 화장실에 갔다. 머리에 물을 촉촉히 적시고, 샴푸 펌프를 눌렀는데 내용물이 찔끔찔끔 나왔다. 거의 다 쓴 것이었다. 샴푸통에 물을 넣고, 흔들었다. 이번엔 보디클렌저 펌프를 눌렀는데 역시 픽픽 나왔다. 샴푸에 이어 보디클렌저까지 다 쓴 것이었다. 여기까지는 그럴 수 있다 쳤다. 샤워를 마치고, 보디로션 펌프를 눌렀는데! 또! 공기 반 내용물 반이 손에 담겼다. 치약? 치약도 당연히 끝을 보였다. 크림? 말해 무엇할까.


인터넷 쇼핑몰에서 샴푸, 보디클렌저, 보디로션, 치약 그리고 크림을 장바구니에 담았다. 칫솔도 넣었다. 분명 ‘다 써가니까 주문해야지!’ 했을 것이다, 과거의 어느 시점에. 그걸 잊어서 이런 사태가 벌어졌을 것이다. 그랬을 것이다. 그런데 왜 항상, 언제나, 한 번도 빠짐없이 비슷한 시기에 다 떨어질까. 돈이 있을 때 이런 일이 벌어지는 건 괜찮다. 그런데 이런 일 역시 항상, 언제나, 한 번도 빠짐없이 가난할 때 생긴다.


나만 그런가 싶어 친구에게 물어봤다. 격하게 공감하며 ‘나도 그래!’라고 했다. 다른 친구도 ‘나만 그런 게 아니었구나?’ 답했다. 이쯤 되니 집 안에 있는, 정체모를 무언가를 향해 매서운(?) 눈빛을 보낼 수밖에 없어졌다. 샴푸, 보디클렌저, 보디로션 등에게도 ‘나는 알고 있어! 너희의 계략을 안다고!’의 의미를 담은 눈빛을 쐈다.



한집에서 오손도손 정답게 살면 얼마나 좋니.
가난한 나 좀 봐주라.



거의 바닥 난 통장을 떠올리며 도착한 택배를 정리했다. 그래, 이런 걸 사기 위해 돈을 버는 것이지. 쓸 데 쓴 거야. 낭비한 거 아니야. 최저가에 무료배송 되는 것만 골랐으니까. 나를 다독였다. 그러다 번득, 눈이 뜨였다. 생리예정일이 가까운데 생리대랑 탐폰은 있나? 재빨리 생리대 보관함을 열었다. 비었다. 아무것도 없었다. 와… 와… 와… 머릿속에서 벌이 윙윙거렸다. 척추를 타고 땀이 흘렀다. 돈을 탈탈 털어서 필요한 거 다 샀는데… 그랬는데… 예민하신 내 몸뚱이님은 비싼 유기농 생리대와 외국 브랜드 탐폰의 조합만을 허락하시는데… 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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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꺼번에 넉넉히 사고, 수시로 점검해서 채우면 된다. 허나 애초에 풍족하지 않은 나는, 불가능하다. (월급 112만 원을 받고 회사를 다녔을 때니까.) 게다가 고정적, 필수적으로 나가는 교통비, 월세, 관리비, 통신비 등을 합한 몸집은 제법 컸다. 수시로 점검? 퇴근 후 고정적, 필수적으로 해야 하는 일에 쫓기는데 가능할 리가. 소비가 많은 편이냐고? 뭐하나 살 때도 여윳돈, 받을 월급 어쩌고저쩌고 따진 후에 ‘구매 가능’하면 산다. 그 와중에 생리대와 탐폰까지 마련해야 하니… 다 포기하고 저렴한 생리대를 착용하면 약값과 병원비가 더 들고… 하…

돈이 없을 때나 몸이 힘들 때 등등 뭐든 부담스러울 땐 ‘생리’를 잠깐 끄고 싶다. ON/OFF 버튼이 있어서 내 마음대로 조절할 수 있으면 한다. 이런 내 마음과 사정도 모르는지 우리집엔 여전히, 변함없이 (의심스러운) 누군가에 의한 계략이 흐르고 있다.

분명하다.


-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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