앰버 이야기
하다에게 이런 부탁을 받았다. 너무 재밌을 것 같아서 지금 바로 쓸 거다. 근데 2019년을 보내는 마음이라… 말이 왠지 어렵다. 매년 가는 해가 아쉽고 내년엔 더 좋은 시간을 보내고 싶긴 하지만, 마음이라고 하니 어렵게 다가온다. 그래서 주제를 살짝 바꿔 볼 거다. 2019년 결산을 진행해 보자. 주제를 세 가지 정도로 잡고, 주제 별로 1~3위를 매겨 보려고 한다.
이 글을 읽는 여러분은 저 문장에서 이 문장으로 넘어오기까지 1초도 안 걸렸겠지만, 지금의 나에게는 약 10여 분의 시간이 흘렀다. 주제를 잡았다. 오늘 글은 약간 길어질지도 모르겠다.
앰버(또는 엠버)가 꼽는 2019 기억에 남는 음악, 인물, 소비. 지금부터 시작해 보자.
3위는 짙은의 ‘백야’다.
빛나는 하늘과 떨리는 두 손과
나를 바라보는 너의 그 깊은 미소가
난 울지 않을래 피하지 않을래
어둠 속의 빛으로 넌 내게 머물러
한 해가 그 해에 처음으로 듣는 음악을 따라 간다는 미신 아닌 미신이 있다. 그 말 때문에 해가 넘어가는 순간에는 신중하게 고른 음악을 듣곤 한다. 어영부영 있다가 대충 틀어둔 연말 가요 프로그램에서 나오는 노래를 들으면 아까우니까… ‘백야’는 2018년 12월 31일 밤에 아주 신중하게 선곡한 노래다. 열아홉 살 등굣길에 자주 듣던 곡이기도 하다. 노래를 들을 때에 가사를 많이 보는데 ‘백야’의 노랫말은 작게 움츠러들었던 마음을 다잡을 수 있도록 도와준다. 어떤 생각으로 이런 말들을 엮어 가사를 썼는지 모르지만, 적어도 내게는 용기와 담대함을 주는 말들이라 새삼스레 기억에 남는다.
2위는 자우림의 ‘팬이야’다.
내보일 것 하나 없는 나의 인생에도 용기는 필요해
지지 않고 매일 살아남아 내일 다시 걷기 위해서
나는 알고 있어 너도 나와 똑같다는 것을
주저앉지 않기 위해 너도 하늘을 보잖아
언젠가의 그날을 향해
I see the light shining in your eyes
동료가 알려준 노래다. 그 날 이후로 며칠 간 출퇴근길에 계속해서 들었다. 별 일 없이 지쳤던 날 퇴근길, 이어폰을 꽂고 버스에 앉아 이 노래를 듣는데 심장이 두근거렸다. 설레는 것 같기도 하고, 눈물이 날 것 같기도 했다. 내보일 것 없는 나의 인생에도 매일 살아남아 걷기 위해 용기가 필요하다는 건 아마 그 때의 나에게 필요한 말이었던 것 같다. 비현실적인 꿈이나 허황된 희망을 주는 대신 그저 삶을 지속하기 위해서도 용기가 필요하다는 말을 이 노래가 내게 해 주었다. 꼭 필요한 말이었고, 내가 다시 움직일 수 있도록 도와준 노래였다. 그래서 2위에 선정한다.
대망의 1위는 이상은의 ‘비밀의 화원’이다.
월요일도 화요일도 봄에도
겨울에도 해가 질 무렵에도
비둘기를 안은 아이같이
행복해 줘 나를 위해서
역시 하반기에 많이 들은 노래다. 특유의 소년 같은 목소리로 듣는 사람을 토닥이는 노래다. 화려한 기교나 장식 없이 정갈한 위로를 건넨다. 그대가 나의 초라한 마음을 받아준 순간부터 다시 꿈을 꾸게 되었다, 나를 위해서 행복해 달라, 하는 말들이 노래를 통해 마음에 차곡차곡 쌓이는 것 같다. 다른 누군가가 아닌 자신을 위해 행복해져야 한다는 건 누구나 알고 있지만, 사실 그게 쉬운 일은 아니다. 여러가지 이유로 지쳐 있는 사람이 힘을 낼 수 있도록 어떤 명분을 주는 노래다. 이렇게 위로 받다 보면 언젠가는 온전히 나를 위해 건강하고 행복한 마음으로 살아갈 수 있을 것만 같은 생각이 든다.
3위는 ‘황소윤’이다.
이미 앞서 기나긴 주접(ㅋㅋ)을 떨어 놨기에 더 할 말이 있을까 싶지만, 어쨌든 올해 내가 많이 좋아했던 사람이니까. 음악이나 퍼포먼스야 말할 것도 없이 훌륭한 사람이니 오늘은 다른 것에 대해 짧게 말하고 싶다. 그의 눈빛. 소극적이거나 상냥하지 않은, 도전적이고 여유로우며 자신만만한 눈빛. 그게 너무 좋다. 항상 느끼지만, 록스타의 차림에 단단하고 곧은 눈빛과 무신경한 표정이 더해져 시각적으로 엄청난 시너지를 낸다. 게다가 상투적이고 지겨운 사랑 노래 대신 다양한 주제를 담은 노래들로 채워진 앨범을 낸다는 것까지, 난 정말 이 사람을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는지 궁금하다. 아마 수십 년이 지나도 멋진 아티스트로 기억 속에 박혀 있을 것 같다. 더 쓰면 주체 안 되게 길어질 것 같아 이만 줄인다.
1위와 2위는 순위를 매기기 어려우니 공동 1위로 하겠다. 공동 1위는 ‘박막례’와 ‘김유라’다.
전세계적으로 이렇게까지 화제가 된 국내 유튜버가 이전에 있었나? 아니. 심지어 여성 노인과 그의 손녀라면? 절대 아니. 이들은 애쓰지 않는다(물론 이들이 노력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다. 이렇게 되기까지 수많은 연구와 노력으로 시간을 보냈을 걸 안다.). 어떤 모습을 꾸며내거나 과하게 다듬지 않고, 할머니와 손녀의 자연스러운 시간들을 재치 있게 담아낸 영상이 지금의 이들을 만들었다. 또한 나이와 무관하게 계속해서 도전하고 웃고 떠들고 이야기 나누며 새로운 것을 경험하는 ‘박막례’와 ‘김유라’의 삶의 태도는 많은 이들에게 희망과 자신감을 불어넣어 준다. 나이 든, 그리고 젊은 여성이 추억거리를 위해 만들어낸 작은 물결이 거대한 파도가 되어가는 모습에 박수를 보내고 싶다.
3위는 ‘와이드 팬츠’다. 사실은 ‘편안한 옷’으로 묶고 싶은데, 그냥 대표격인 ‘와이드 팬츠’를 꼽았다. 와이드 팬츠를 입기 시작한 건 꽤 된 일이지만, 지난 여름 끝물에 모 SPA 브랜드에서 산 갈색 와이드 팬츠가 너무 마음에 들어 3위로 꼽는다. 온도와 습도가 높은 우리나라의 여름을 지내며 느꼈다. 더위를 많이 타는 내게 와이드 팬츠는 더 이상 선택이 아니었다. 그렇게 구매한 바지는 소재도, 색깔도, 착용감도 아주 마음에 들었다. 거의 일주일에 두 번은 입었던 것 같다. 심지어 튼튼하기까지 해서 꽤 오래 입을 수 있을 것 같다. 아주 만족스러운 소비였다.
여성의 신체 구조 상, 하반신 전체를 조이는 스키니진은 건강에 무리를 준다. 소화불량, 질염, 방광염, 변비 등 굳이 더 말하지 않아도 이미 많은 여성이 이 불편함을 공유하고 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런 의미에서 와이드 팬츠를 비롯한 편안한 옷들의 유행이 너무나 반갑다. 따라서 와이드 팬츠(로 대표되는 편안한 옷들)를 2019 기억에 남는 소비 3위로 꼽으려 한다.
2위는 ‘에어팟 2’이다.
솔직히 에어팟 2를 2위로 꼽은 이유는 ‘아주 만족스럽다’는 의미가 아니다. 긴가민가해서 기억에 남는 거다. 물론 잘 쓰고 있다. 줄이 거슬리거나 휴대폰 충전과 동시에 음악을 듣고 싶거나 뭐 그런 때에 유용하긴 하다. 그러나 솔직히 이 가격에 살 만한 제품이 맞나 싶다. 편리하고 좋긴 한데 음질이 아주 뛰어난 것도 아니고(잘 모르기 때문일지 모르지만, 딱 이어팟 수준으로 들린다.), 엄청 튼튼한 것도 아닌데 20만 원이 넘어가는 가격이라고 생각하면 약간 아깝게 느껴진다.
당연하게도 가치를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에어팟에 대한 생각이 크게 갈릴 것 같긴 하다. 평소 음악 듣기를 좋아하고, 이어폰 줄로 인한 불편함을 강하게 느꼈던 사람이라면 들인 돈만큼의 가치를 느낄 수 있겠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내가 느낀 불편함은 그 정도는 아니었나 보다. 만약 잃어버린다면 어떨까 생각해보니… 다시 살지 모르겠다. 안 살 수도 있겠다. 몇 번을 한 짝씩 잃어버릴 뻔 해서인지 점점 쫄린다.
마지막 1위는 바로 ‘경량패딩조끼’다.
뭔가 유행하기 시작하면 바로바로 받아들이는 사람이 있고, 망설이다가 받아들이는 사람이 있고, 한참 지켜보다가 받아들이는 사람이 있는데 나는 세 번째 유형이다. 어떤 상품이 스멀스멀 시대를 타기 시작하면 잔잔하게 눈치를 보다가 더 이상 유행의 범주가 아니게 될 때쯤 슬쩍 합류하는 거다. 그 때부턴 이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데에는 이유가 있을 거라는 판단이 서는 거다. 와이드 팬츠도, 에어팟도, 경량패딩조끼도 마찬가지다.
별 관심 없었는데 어느새 안 가지고 있는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로 대중화되어 있었다. 그 때부터 후기를 찾기 시작했다. 잠깐 입어 보기도 했다. 나쁘지 않았다. 게다가 옷 껴입는 걸 좋아하다 보니 하나쯤 있으면 좋을 것 같아서 구매했다. 사실 별로 두껍지도 않고, 가볍긴 엄청 가벼워서 택배가 도착할 때까지도 ‘이게 뭐 얼마나 따뜻하겠어.’하는 생각이었다.
그런데 오산이었다. 대만족이다. 입고 있다는 걸 잊을 만큼 얇고 가벼우면서 아주 따뜻하다. 기모 맨투맨에 경량패딩조끼를 입고 그 위에 도톰한 후디나 플리스 자켓을 입으니 기온이 영하로 떨어지는 날에도 괜찮았다. 좀 걷다 보면 등에서는 열기가 느껴질 정도. 두꺼운 패딩이 불편해서 싫은 나에게 너무나 만족스러운 소비였다. 1위 받을 자격이 차고 넘친다.
기억에 남는 것들을 떠올리면서 자연스레 2019년을 정리하게 되었다. 여느 해와 같이 수많은 일들이 있었고, 항상 그랬듯 연말에는 괜히 감성적인 기분이 든다. 꽤 많은 성취감을 느꼈고, 많이 배웠지만 그만큼 지치는 일도 많았다. 상투적인 표현이라 싫어하지만, 그 언젠가 도움이 될 경험들이라 생각하면 썩 나쁘지 않은 2019년을 보냈다.
- 앰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