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 감수성과 맞바꾼 흉악범의 얼굴
흉악한 연쇄 범죄자가 검거되었다. 잔혹한 범죄와 대비되는 태연한 범인의 표정이 연일 미디어를 장식한다. 분노의 리액션이 SNS를 타고 실시간으로 쏟아지고 태연한 범인의 행동 하나하나가 뉴스가 되어 소비된다. 범죄의 원인과 재발방지라는 의제는 밀려나고 흉악범의 얼굴을 보며 욕하고 분노하는 것이 컨텐츠가 되어 종편과 SNS를 타고 확산된다.
언제부터였을까? 누군가를 위한 적의가 이렇게 당연하게 받아들여진 것이
2009년, 여성 7명을 잔혹하게 살인한 강호순이 검거되었을 때만 해도 뉴스에서 그의 얼굴은 확인할 수 없었다. 수많은 카메라들이 강호순의 주변을 둘러쌓지만 깊게 눌러쓴 모자 밑으로 얼굴 윤곽만 어렴풋이 보일 뿐이었다. 잔혹한 범행을 저지르고도 반성의 모습을 보이지 않는 살인자의 얼굴을 가려주는 친절에 여론은 크게 반발했고 결국 이전 사건들과 달리 경찰은 원칙을 어겨가며 강호순의 얼굴을 언론에 공개하였다. 이후 법무부가 법 개정에 착수, 성인이나 아동 성폭력 등 흉악범죄 피의자의 얼굴을 공개하는 내용의 ‘특정 강력범죄 처벌에 관한 특례법(특강법)’ 개정되어 현재까지 시행되고 있다. 이제 경찰은 법의 판단 하에 흉악범이 검거되면 얼굴을 가리지 않은 채 카메라 앞을 통과하며 보도자료를 통해 이름까지 안내한다.
흉악범의 얼굴을 가리는 중요한 이유는 피의자의 인권 때문이었다. 1심이 확정되기 전 무죄추정인 상태인 피의자의 신상을 대중에게 공개하는 건 옳지 못한다는 이유에서였다. 이것은 단순히 개인의 인권을 지켜야 한다는 당위의 수준이 아니다. 사회에 해를 끼치는 존재인 범죄자는 국가가 보호할 수 있는 가장 아랫단계의 계급이기에 이들의 인권을 지킨다는 것은 사회 밑바닥까지 인권의식이 감싸고 있음을 의미한다. 그들의 얼굴을 가려주는 경찰로서 사소한 행위가 사회에 있어 인권 감수성을 더 풍부하게 만들 수 있는 것이다. 범죄자의 인권이, 가려진 얼굴이 사회에 있어 더 큰 효용이 있기에 더더욱 중요한 것이다.
물론 인권이 절대적인 것은 아니다. 어떠한 가치가 특정인의 인권을 넘어서기도 하고 그것이 사회정의가 될 수도 있다. 강호순의 얼굴이 사회에 기여하는 바가 있다면, 어떠한 효용이 있다면 얼굴을 공개하는 것이 옳을 수도 있다. 하지만 과연 그런가? 대중에게 범죄자의 얼굴을 알리는 것이 사회정의에 부합하는 행위일까? 얼굴을 공개하는 행태가 사회에 어떤 이로움을 가지고 올 수 있을까?
당시 법을 개정한 법무부는 국민의 알 권리를 보장하고 범죄를 예방하는 차원이라 밝혔다. 당사자도 아닌 불특정 다수가 범죄자의 얼굴을 알아야 할 권리는 없다. 더불어 이미 검거된 범죄자의 얼굴을 공개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예방 효과도 없다.
법 개정의 이유는 정확히는 국민의 여론 때문이었고 더 정확히는 흉악범의 얼굴을 보며 마음껏 욕하고 분노하기 위해서였다. 인권이란 가치를 내팽개치면서까지 시원한 사정감을 느끼기 위해서였다. 저렇게 멀쩡한 사람이, 저런 천하의 몹쓸 놈이 하면서 마음껏 분노를 표출하기 위해서였다.
반대편의 목소리는 흉악범을 옹호한다는 논리에 움츠릴 수밖에 없었고 그렇게 우린 연일 뉴스에서 범죄자의 얼굴을 확인하고 분노하고 있다. 우리 사회에 아무런 실익이 없는 행동이 여론에 의해 긍정되었고 종편과 같은 선동적인 매체의 자양분이 되어 우리 일상 속에 분노컨텐츠로 자리 잡았다. 그렇게 우리의 중요한 인권 감수성이 범죄자의 얼굴과 교환되었다. 2001년 국가인권위원회가 설립된 이후의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