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구가 아니라 기억이 흔들린 밤
이상한 날이었다.
특별히 힘들지도 않았고,
기분이 나쁘지도 않았다.
오히려 하루는 꽤 잘 흘러갔다.
그런데 저녁이 되자
문득 맥주가 떠올랐다.
갈증처럼 확 올라오는 욕구는 아니었다.
냄새도 아니고,
맛도 아니고,
딱히 ‘마시고 싶다’는 말로는 설명되지 않는 느낌.
그건 기억에 가까웠다.
예전에 자주 앉던 자리,
퇴근 후 불을 켜지 않은 거실,
아무 생각 없이 리모컨을 누르던 손.
맥주를 따는 소리보다
그 앞에 있던 정적이 먼저 떠올랐다.
‘그때는 이렇게 하루를 접었지.’
오늘의 하루는
아직 접히지 않은 채로 남아 있었다.
그래서 더 어색했다.
맥주를 마시지 않으니
하루를 마무리하는 신호가 없어진 것 같았다.
습관이 사라진 자리에
기억이 조용히 고개를 들었다.
나는 잠시 그 기억을 그대로 두었다.
억지로 밀어내지도,
괜히 다른 걸로 덮어버리지도 않았다.
대신 스스로에게 물었다.
‘지금 내가 원하는 건 뭘까.’
맥주가 아니라면,
이 밤에 내가 진짜 필요한 건 무엇일까.
답은 생각보다 단순했다.
오늘을 잘 보냈다는 안도감,
그리고 아무 일 없이 하루를 닫아도 괜찮다는 허락.
물을 한 잔 마셨다.
시원하지도, 특별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 평범함이
지금의 나에게는 충분했다.
맥주가 생각났던 밤은
실패의 신호가 아니었다.
오히려
내가 얼마나 오래 그 습관과 함께 살아왔는지를
조용히 알려주는 순간이었다.
오늘은 마시지 않았다.
그리고 그 선택은
참아낸 결심이 아니라
기억을 지나쳐 온 하나의 저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