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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깊은 바다 Jan 20. 2024

내 마음의 봄

새해 벽두부터 감기에 걸렸다. 목이 간질간질하고, 온몸이 쑤셨다. 오후에는 한 시간 외출을 끊고 이비인후과에 갔다. 바깥공기는 살을 에는 듯했다. 올 겨울 들어 가장 춥단다. 독감이 유행이라더니 병원은 휑했다. 간단한 인적 사항을 적고 간호사의 안내에 따라 진료실에 들어갔다. 내 또래로 보이는 의사는 친절하게 증세를 물었다. 그러고는 목과 귀를 살폈다. 의사는 주사를 맞는 게 좋을 것 같다고 했다. 간호사는 엉덩이를 서너 번 찰싹 소리가 나게 두들겼다. 주사 바늘이 살을 따끔하게 뚫고 들어왔다. 항생제가 몸으로 밀려들어다. 처방받은 약을 들고 회사에 왔다. 치료받는 데 20분도 걸리지 않았다.


회사에서 저녁을 김밥으로 해결하고, 감기약을 먹었다. 주말부부를 한 지 벌써 4년째다. 혼자 살면서 아프면 서럽다. 나이가 들면 더 그렇다. 관사에 가서 빨리 쉬고 싶었다. 차에 탔는데, 오한으로 이까지 부들부들 떨렸다. 점퍼의 지퍼를 목까지 올리고, 목도리를 동여맸다. 차 히터도 세게 틀었다. 관사에 도착하니 맘이 조금 놓였다. 복도를 걷는데, 102호에 사는 옆집 할머니가 현관문을 열고 빼꼼히 쳐다봤다. 그리고는 바로 문을 닫았다. 할머니에게 할 말이 있었는데, 기회를 놓쳤다. 그것보다는 보일러를 틀고, 따뜻하게 눕고 싶은 마음이 컸다.


현관 문의 비밀번호를 눌렀다. 문이 열리지 않았다. 다시 한번 숫자 하나하나를 또박또박 눌렀다. 마찬가지다. 다섯 번 연속으로 틀리니 2분간 먹통이다. 도어록이 오래된 데다, 날씨도 추워서 배터리도 약해진 듯했다. 스무 번 가까이해도 똑같았다. 인터넷을 검색해도 또렷한 수가 없다. 열쇠 수리공을 부르거나 또는 여관에 가거나 둘 중의 하나다. 며칠 후면 발령이 날 건데, 몇십만 원 들어갈 걸 생각하니 속이 쓰리다. 그때 누군가 걸어왔다. 옆집 할머니와 같이 사는 30대 중반의 아들이었다. 키는 170cm쯤에 몸무게는 100kg이 넘을 것 같았다. 2년 만에 처음 마주쳤다. 그는 시큰둥하게 문을 열고 들어갔다. 할머니는 아들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았다. '이게 마지막이다'대여섯 번 반복할 때쯤 도어록에서 "디디디딕" 소리가 났다. 안도의 한숨이 절로 나왔다. 집에 들어가자마자 배터리를 새 걸로 갈고, 비밀번호도 가장 쉬운 네 자리 숫자로 바꿨다.   


매트의 온도를 40도로 올렸다. 방도 따뜻해졌다. 이불을 둘러쓰니 약기운 때문에 스르르 눈이 감겼다. 고양이 울음소리에 눈이 떠졌다. 1층 화단에서 난다. 이12시다. 1년 전쯤 집고양이가 탈출해서 우리 집 앞에서 운 적이 있다. 크게 우니 주인이 찾아가겠지 했다. 웬걸 두세 시간 계속 울어댔다. 울음소리의 크기나 날카로움을 봤을 때 발정 난 고양이가 분명했다. 암놈과 수놈이 번 갈아가면서 신경을 곤두세웠다. 도저히 견딜 수 없어, 베란다에서 화단을 바라봤다. 고양이도 내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네가 째려보면 어쩔 건데'라는 눈빛이다. 도저히 참을 수 없다. 잠옷에 외출복을 껴입고, 밖으로 나갔다. 고양이는 사리지고 없었다. 순찰 도는 경비 선생님에게 물어보니, 요즘 아파트에 발정 난 고양이가 많단다. 다시 들어와 누웠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지금쯤 임신하면 따뜻한 봄에 새끼를 낳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우연인지는 모르겠지만, 현명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감기는 추위와 함께 사그라들었다.


며칠 후 경비실을 찾았다. 이번에는 관사 앞 복도에 쌓인 짐을 치워달라고 했다. 2년 전 이사 왔을 때에 비하면 물건이 많아졌다. 빈병, 플라스틱, 고철 같은 잡동사니다. 주인은 102호 할머니다.  몇 달 전 치워달라고 말하려다 그만두었다. 혼자 사는데, 크게 불편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할머니는 내가 퇴근하면 항상 존댓말로 웃으면서 밥은 먹었냐고 묻는다. 할머니는 몇 달 전에 봤을 때 자꾸 머리가 어지럽다고 했다. 그래서 더 안쓰러웠다. 어쩌면 내 부담을 누군가에게 미루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경비 선생님은 할머니에게 몇 번 말했지만 소용없다고 했다. 할머니가 치매에 걸렸는지 자꾸 이상한 행동을 한다고도 했다.    


1월 15일 자로 목포로 발령이 났다. 관리비를 정산하려고 관리사무소에 전화한 김에 다시 한번 부탁했다. 뒷사람에게 부담을 주고 갈 수는 없었다. 퇴근했는데, 복도가 깨끗했다. 경비 선생님은 관리사무소 직원들과 함께 치웠다고 했다.


1월 13일, 이삿짐을 쌌다. 복도에 나온 할머니에게 이사 갈 거라고 인사드렸다. 할머니는 정이 들었는데, 서운하다고 했다. 이사하는 동안 집을 들락날락거렸다. 다행히 복도가 깨끗해진 이유는 모르는 것 같았다. 마지막 짐을 나를 무렵, 할머니 집에서 나왔다. 할머니의 손에는 구겨진 만 원짜리 한 장이 쥐여 있었다. 주름진 손을 나에게 내밀더니, 성냥이라도 사라고 했다. 나는 손사래를 치며 차에 올라탔다. 백미러로 집으로 들어가는 할머니의 뒷모습 봤다. 초등학교 시절 방학 때면 할머니가 사는 서울 큰집에 놀러 갔다. 시골집에 내려올 때면 할머니는 항상 눈망울이 촉촉했다. 옆집 할머니의 뒷모습에서 친할머니가 보이는 듯했다.  


인천 톨케이트를 지나 고속도로를 탔다. 햇볕은 따뜻했다. 남쪽으로 내려올수록 더 그랬다. 할머니의 따뜻한 정까지 더해졌으니, 어찌 따뜻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벌써 봄은 내 마음에  듯했다.

<할머니의 짐>
<몇 년 전 가출한 고양이>
<발정난 고양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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