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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깊은 바다 Jan 27. 2024

당근, 잠시만 안녕

당근 거래 후기

승용차에 이불과 옷 같은 짐을 가득 실었다. 초등학생 두 아이는 현관에 서서 눈을 크게 뜨고 문을 여는 나를 똘망똘망 바라봤다. 아내의 한숨 소리는 송곳처럼 내 가슴을 후볐다. 나는 곧장 엘리베이터에 탔다. 이미 눈망울이 촉촉해져 뒤돌아보면 눈물이 터질 것만 같았다. 거꾸로 매달아도 돈다는 국방부 시계처럼, 주말부부로 지낸 4년도 흘렀다. 그 세월만큼 내 뱃살과 주름, 관사의 짐은 많이 늘었다. 발령 날짜가 잡히자 1톤 포장 이사를 예약하고, 몇 가지 물건은 정리하려고 마음먹었다.


지금까지 당근(중고 물건 거래 앱)은 중고 물건을 사는 데였다. 기러기아빠로 살면서 소형 냉장고며, 비디오 게임기 같은 것들을 샀다. 이제는 팔 때다. 물티슈로 정성스레 냉장고의 먼지를 닦아냈다. 시원한 맥주를 꺼내서 마시고, 신김치를 꺼내서 라면으로 끼니를 때우던 순간들이 스쳐 지나갔다. 당근에 올릴 사진부터 찍었다. 가격은 3만 원으로 매겼다. 3년 전에 2만 원 주고 산 냉장고와 직원이 심심할 때 보라고 준 19인치 텔레비전, 거기다가 잘 쓰지 않는 청소기와 전 사람이 구석에 박아둔 깨끗한 전자레인지까지 모두 가져가라고 했다. 하루쯤 지나서 당근 알림이 울렸다. 낚싯대의 미끼가 떨어졌나 의심할 무렵 청명하게 울리는 방울 소리 같았다. 거래는 신속하게 진행됐다. 약속 시간에 맞춰 50대 중반 아저씨가 1톤 화물차를 타고 왔다. 아내의 가게에서 쓰려고 한다며, 짐을 착착 실었다. 아저씨는 작업복 주머니에서 지폐 뭉텅이를 꺼냈다. 그러고는 잘 쓰겠다는 인사와 함께 만 원짜리 석 장을 건넸다. 물건을 파는 건 사는 것과는 또 다른 재미가 있었다. 가격을 매기고, 흥정하며, 돈을 버는 것, 월급쟁이만 20년 넘게 한 나로서는 자주 느껴보지 못한 쾌감이었다.


곧이어 가구 나눔을 올렸다. 책장과 서랍장 두 개였다. 집에 가져오면 짐이고, 버리면 돈이다. 조건은 세 개 다 가져가는 거였다. 이번에는 바로 알람이 울렸다. 그런데 문자가 이상했다. '나는 원해요', '나는 멀리 있지 않다.' 번역기를 돌린 티가 났다. 외국인이냐고 물었더니 그렇단다. 관사 주변에 외국인 노동자들이 종종 보여서 그럴 수 있겠다 싶었다. 약속 시간에 맞춰 물건을 끙끙대며 복도에 내놨다. 이번에는 20대 중반으로 보이는 중앙아시아계 남자가 나타났다. 그는 한국말을 잘하지 못했다. 그는 스마트폰의 불빛을 켜고 가구 곳곳을 살펴보더니 상태가 좋고 가벼운 책장 하나만 집었다. 책장은 미끼였는데, 그것만 먹고 가겠다는 심보였다. 그렇다고 차도 없이 온 사람에게 매몰차게 대할 수도 없었다. 나는 책장을 들고 가는 그의 뒷모습만 바라봤다. 나머지 두 개는 낑낑대며 원위치로 돌려놨다. 물건을 처분하고 나니, 이사는 한결 수월했다.


목포에 와서도 당근 거래 계속다. 집의 물건이 팔 수 있는 것과 그렇지 못한 것으로 나눠 보였다. 발령 나면서 바꾼 스마트폰부터 올렸다. 시세를 검색해 보니 10만 원이면 될 것 같았다. 곧 알람이 왔다. '가격이 조금 내려주세요'라는 문자였다. 이번에도 외국인이다. 나는 외국인에게 인심이 후한 편이다. 시원하게 만 원 깎아서 9만 원! 그들은 우리 아파트로 찾아왔다. 우즈베키스탄 사람이다. 한 명은 통역하려고 따라온 것 같았다. 그는 내 계좌 번호를 물었다. 외국인이 인터넷 뱅킹을 쓴다고 하니 조금 생경했다. 보려고 본 게 아닌데, 그의 통장에는 2천만 원이 넘게 있었다. 내 계좌번호를 외우지 못해서 인터넷 뱅킹으로 들어갔다. 내 잔고36만 원이다. 물론 보이는 게 다는 아니다. 스마트폰에서 Sxxxxx RU가 9만 원을 입금했다 알림이 울렸다. 당근 장사를 잘해서 직원들에게 전입 인사로 밥 살 돈은 벌었다. 그것도 국제 거래를 통해서 말이다.


쇠뿔도 단김에 빼라고 했다. 이번에는 아들과 딸이 초등학교 때 타던 자전거다. 몇 년째 복도에 방치돼 옆집에도 미안했다. 집에 여럿이 오갔는데, 달라는 사람이 없는 걸 보면 분명 짐이다. 이번에는 삼만 원에 올렸다. 바로 알람이 왔다. 덩치가 큰 초등학교 6학년 아들에게 주려고 하는데, 탈 수 있겠냐며 물었다. 딸이 초등학교 3학년 때까지 타던 거라서 어울리지 않을 거라고 했다. 거래 실패다. 초등학교 3학년 때까지 타던 거라고 판매 글을 고쳤다. 다시 알람이 울렸다. 이름이 루스x이다. 외국인이냐고 물으니 그렇단다. 자전거를 사고 싶다며, 토요일 퇴근하고 아파트로 오겠다고 했다. 그날따라 겨울비가 세게 내렸다. 나는 자전거의 먼지를 닦아 냈다. 딸이 두 발 자전거를 처음 타던 날이 떠 올랐다. 애들과의 추억이 담긴 물건을 팔려고 하니 시원섭섭했다. 자전거를 끌고 약속 장소로 갔다. 송아지를 장에 내다 팔던 아버지 마음도 이랬을까! 이번에도 우즈베키스탄 사람이다. 20대 중후반으로 보이는 건장한 남자다. 그는 작업복을 입고 있었다. 나를 알아본 듯 비를 맞으며 걸어왔다. 나는 그에게 우산을 씌어 줬다. 그런다고 세찬 빗방울을 피할 수는 없었다. 애들에게 줄 거냐고 물으니 자기가 탈 거란다. 그것도 10km쯤 떨어진 조선소까지 출퇴근하는 데 쓸 거란다. 덩치가 커서 타지 못할 거라고 했다. 그는 자전거 바퀴부터 프레임(자전거의 뼈대), 발판, 여기저기를 만져 봤다. 나는 계속 부정적으로 말했다. 그도 망설였지만, 쉽게 포기하지는 못했다. 자전거를 살펴보느라 그의 옷은 이미 젖었다. 그는 나를 보며 만 원만 깎아달라고 했다. 이건 이성의 문제가 아니었다. 나는 고개를 저을 수가 없었다. 그가 보낸 2만 원은 내 통장을 거쳐 아내에게 입금됐다. 아내의 얼굴에 미소가 비쳤다.        

 

게임기 두 대도 내놨다. 20여 년 전, 선원을 그만두면서 산 플스 2는 2만 원에 내놨다. 아이들이 어렸을 때 생일과 크리스마스가 되면 엄마를 졸라 게임을 하곤 했다. 아이들의 스마트폰이 생기고 새로운 게임기를 사면서 구석에 처 박힌 지 오래다. 먼지를 닦다 보니, 조이스틱에 안산에 있는 치킨집 스티커가 눈에 띄었다. 왜 붙였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20대 때 배를 내리고 직업을 구하지 못해 방황할 때가 잔상처럼 스쳐 지나갔다. 가격 때문이지, 물어보는 사람이 여럿 있었다. 그중에서도 적극적으로 의사를 표시한 사람과 거래했다. 그는 물건은 볼 필요도 없다며 2만 원을 내밀었다. 나는 아이들에게 만 원짜리 한 장씩을 나눠줬다. 아이들의 추억도 담겨 있으니 그러고 싶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다시 알람이 울렸다. 물건을 사 간 사람이었다. 네트워크 어댑터라는 부품이 빠져 있단다. 그게 있냐고 물었을 때 착각해서 있다고 말했었다. 사실 지금까지 한 번도 써 보지 않은 거라서 별생각 없이 대답했다. 나는 반품해 주겠다고 했다. 그는 그럴 필요까지는 없고 5천 원만 빼달라고 했다. 살짝 낚인 기분이 들었지만, 그러자고 했다. 이번에는 손해 보는 장사였다.


이제 플스 4만 팔면 됐다. 내가 당근으로 처음 산 물건이다. 나는 두 개를 사서 목포와 관사에 두었다. 관사에서는 심심할 때 게임을 하고, 유튜브를 보며 운동도 했다. 넷플릭스로 영화를 볼 수도 있었다. 쓸모가 많은 친구 같은 기계였다. 목포에서는 아들과 나를 연결해 주던 매개체였다. 아들이 중2병을 심하게 앓을 때도 그랬다. 아들은 웃음을 잃고, 말도 잘하지 않았다. 이때는 언제나 사이좋은 부자지간이었다. 아들은 "아빠, 한 판 해요"라며 식탁 의자 두 개를 텔레비전 앞으로 가져왔다. 축구 게임을 하며, 웃기도 하고, 대화도 나눴다. 아내도 그래서인지 세 판까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면 45분이 훌쩍 지나갔다. 그랬던 플스 4도 나를 따라 인천에서 내려온 플스 5에 자리를 내줬다.


먼저 20만 원에 올렸다. 생각보다 관심을 받지 못했다. 15%씩 깎다 보니 어느새 15만 3천 원까지 내려갔다. 터무니없는 값을 부르는 외국인의 잔입질이 몇 번 왔다. 몇 시간 지나서, 진짜 사려는 사람이 나타났다. 거래 내역이 상당히 많고, 매너도 좋은 사람 같았다. 구체적인 모델명과 거래 날짜, 장소까지 물었다. 자기가 살 테니까 3천 원만 깎아 달라고 했다. 나는 안 된다고 했다. 돈이 아까워서가 아니라 막상 팔려고 하니 마음이 흔들렸다. 사실 헤어질 결심이 안 돼 있던 것 같다. 그의 문자가 올 때마다 선택이 요동쳤다. 새 기계에 밀려 언제 다시 켜질지 모르지만, 쉽게 놓아줄 수 없었다. 물건 이상의 의미를 담고 있었기 때문이다. 15만 원에 아이와의 추억을 팔 수는 없었다. 시간이 지나면 값어치는 떨어지겠지만, 그래야 더 홀가분하게 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거래를 거둬들였다. 상대방도 내가 못 미더웠는지 나를 차단했다. 민망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얼마 전 당근을 검색하다 재밌는 글을 발견했다. 글쓴이는 당근 앱을 지웠다고 했다. 이유는 남편마저 팔지도 모르기 때문이라고 했다. 나도 당분간 당근을 떠나려고 한다. 추억까지 팔려했던 내 실수의 감정이 아물면 다시 당근 장사를 시작해 보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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