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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깊은 바다 Mar 08. 2024

아무튼 77

1에서 100까지의 수 중에서 하나만 꼽아 보라고 한다면, 망설이지 않고 77을 고를 것이다. 평생 가장 가까이에서 함께 수이기 때문이다. 인터넷 사이트에 가입하거나 계좌를 만들 때도 77은 빠지지 않다. 그러고보니 전화번호에도 있다. 학교에 다닐 때는 이 숫자가 살짝 밉기도 했다. 학기 초, 선생님께서 77년생 손들어 보라고 하면 고개를 살짝 숙이고 멋쩍게 손을 들었다. 그러면 키득대며 앞으로 형이라고 부르라 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그렇다. 나는 친구들보다 한 살 어린 빠른 77년생이다. 오십에 가까워지다 보니 이제는 친구들을 만나면 한 살 젊다는 걸 강조할 때도 있다. 나이 들수록 77은 내게 주어진 행운의 숫자 또는 선물 같다.

그러던 77이 내게 충격을 줬다. 작년 12월의 어느 날이었다. 주말부부를 했는데, 주말에 내려오면 집사람의 잔소리가 심해졌다. 내 몸 때문이다.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은 흉했다. 얼굴은 알파벳 대문자 오(O), 배는 디(D)의 형상이었다. 집사람은 저울에 올라가 보라고 했다. 저울의 숫자가 빠르게 올라가더니, 77.7에서 멈췄다. 고도비만이다. 아내는 도대체 어떻게 살고 있느냐며 성을 냈다.

다섯 달 전쯤, 헬스장에서 몸무게를 쟀다. 곧 십의 자리 숫자가 6으로 바뀔 것 같아 좋아했다. 대학을 졸업하고 20여 년 넘게 70kg 이상이었다. 두세 번쯤 앞자리를 바꿀 기회가 있었으나, 번번이 실패했다. 가장 큰 이유는 방심이었다. 70kg에 가까워지면 나태해져 식사량을 조절하지 못하거나, 운동을 게을리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일이 바쁘다는 핑계로 헬스장은 끊었고, 연말과 발령을 이유로 술자리에 자주 끼었다.

12월 중순쯤, 일본 출장을 갔다. 과장님의 일본 친구분이 저녁 식사에 초대했다. 복어 애와 회가 한 상 차려졌다. 샤부샤부에 들어갈 복어는 대부분의 살점을 떼어 냈는데도 생명의 끈을 놓지 못하고 미세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신선한 안주가 있고, 분위기까지 좋아서, 정종이 술술 들어갔다. 술잔이 몇 순배 돌 때쯤이었다. 속이 메슥거리더니, 얼굴이 경직해 왔다. 한 잔만 더 마시면 심장이 그대로 멈춰버릴 것만 같았다. 난생처음 느끼는 기분이었다. 사실, 한 달 가까이 매일 마시다시피 했다. 아내에게는 술도 자주 안 마시고, 운동도 열심히 한다고 했지만, 입과는 다르게 몸은 거짓말을 하지 못했다.

다행히 올해 1월 중순, 집이 있는 목포로 발령이 났다. 인천에서 홀로 지낸 지 4년 만이다. 새해를 맞아 목표를 여러 개 세웠다. 한 달에 세 권 이상 책 읽기, 일주일에 글 한 편 쓰기, 영어 공부하기, 몸무게 60kg대로 만들기 등이다. 그중에 몇 개는 두 달이 지난 지금도 실천 중이다.

요즘 스마트폰 알람은 새벽 5시 50분에 울린다. 얼굴에 물만 묻히고 헬스장에 간다. 먼저 러닝머신에 오른다. 달리면서 영어 회화 강의를 듣는다. 목표는 45분, 4km 이상을 뛰는 것이다. 운동도 시작이 반이다. 아무리 귀찮고, 힘들어도 러닝머신 위에만 오르면 목표를 채우게 된다. 10분까지가 가장 힘들다. 20분쯤 지나면 땀이 송골송골 맺힌다. 다 뛰고 나면 옷이 축축해진다. 근육 운동으로 마무리한다. 따뜻한 물로 몸을 씻고, 마지막은 차가운 물로 세수한다.

운동을 마치면 저울에 올라간다. 살은 숨만 쉬어도 찌는 것 같지만, 빠지는 건 왜 이리 더딘지 모르겠다. 그래도 꾸준히 했더니 3kg쯤 줄었다. 이제 얼굴은 알파벳 소문자 오(o), 배는 디(d)쯤 되는 것 같다. 살이 찌면서 심해졌던 목과 허리 디스크도 한결 나아졌다. 운동하면 도파민, 엔도르핀과 같은 호르몬을 분비해 우울증과 스트레스를 줄이고 활력을 얻을 수 있다고 한다. 덕분에 하루를 활기차고 상쾌하게 시작할 수 있다. 아침부터 목표 하나를 달성했다는 성취감은 덤으로 얻는다.

77.7은 내 나태함을 경고하는 신호이자, 건강을 되찾아 준 행운의 숫자다. 오늘도 몸무게 십의 앞 자리 수를 바꾸려고 열심히 뛴다. 거울을 보니, 피부도 탱글탱글해다. 회사 엘리베이터에서 녹즙 배달 선생님을 만났다. 반갑게 웃으며 인사했다. 선생님은 나를 보더니, 요즘 피부가 까칠해졌는데, 야채즙 좀 마셔 보라고 한다. 아무튼, 77년생이면 건강을 챙겨야 할 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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