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일 오전부터 장맛비가 세차게 내렸다. 비는 점심을 다 먹을 때까지 그치지 않았다. 산책을 포기하고, 사무실로 곧장 올라왔다. 책상에 앉아 유튜브를 보다가 저절로 눈이 감겼다. 10분쯤 잤다. 몸이 찌뿌둥했다. 조금이라도 움직여야 할 것 같았다. 복도를 걷다가, 문득 회사 별관 교육센터에 있는 책장이 떠올랐다. <2013년도 젊은 작가 수상작집>을 읽어 볼 일이 생겼는데, 그곳에 가면 있을 것도 같았다.
5년 전에 회사 직장협의회 위원장을 맡았다. 업무 담당자는 내가 적임자라고 했다. 임무나 능력이 뛰어나다기보다는, 그의 부탁을 가장 잘 들어줄 거라는 믿음 때문인 것 같았다. 할 일 없고, 부담도 적다는데, 거부할 명분이 마땅히 없었다. 그의 말대로 다 정해진 결과에 서명하거나, 가끔 협의회 회원들에게 점심을 사주는 게 내 역할이었다. 그해 11월쯤이었을까! 담당자가 찾아오더니, 올해 마지막 회의인데, 이번에는 모여 보자고 했다. 직장협의회는 기관장과 공무원의 근무 환경 개선, 업무 능률 향상, 고충 처리 등을 협의할 수 있도록 결성된 공무원 단체다. 우리 회사에 도입된 초기라서 역할도 정립되지 않았고, 예산도 부족해서 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았다. 그래도 아무것도 안 하는 건 무책임해 보였나 보다.
그날 회의에서 여러 의견이 나왔다. 나는 직원들에게 책을 기증받아서 서로 나눠 보자는 아이디어를 냈다. 1층 휴게실에 책장이 있었다. 둘러보는 데는 시간이 꽤 걸렸지만, 결국은 빈손으로 올라올 때가 많았다. 대부분이 도립도서관에서 준 우수 문학 도서 선정 보급 사업에 선정된 책이었다. 독자들의 선택을 받지 못한 비운의 책은 도서관에서도 밀려 이곳까지 오게 된 것이다. 직원들은 적극적으로 참여해 주었고, 200권이 넘는 책이 모였다. <총 균 쇠>, <피엔스>와 같은 베스트셀러뿐만 아니라 판타지 소설 <묵향> 전질 38권을 내놓은 사람도 있었다. 나는 정재승의 <열두 발자국>을 냈다.
올해 1월, 4년 만에 발령을 받아 그 책을 다시 볼 수 있었다. 1층에 있던 책장은 휴게실 환경 개선 공사 때 별관으로 밀려났다. 2월에 책장을 봤을 때 옛 친구처럼 반가웠다. 나는 책장을 천천히 살펴봤다. 예전 있던 책이 대부분 자리를 굳건히 지키고 있었다. 아쉽게도 <열두 발자국>은 사라지고 없었다.
빗소리에 묻혀 정적이 감도는 교육센터에 들어섰다. 불도 켜지 않고, 책장을 향해 다가섰다. 오른쪽 첫 번째 칸부터 책 제목을 읽어 나갔다. 채 1분도 지나지 않아서 책장을 향해 내 손을 뻗었다. 독서 토론 모임 회원이 추천했고, 최근 많은 사람이 다시 찾는다는 양귀자의 <모순>이었다. 원래 뜻하는 바를 이루지는 못했지만, 그동안 알지 못해서 눈에 띄지 않던 <모순>을 건진 것만으로도 행복한 금요일 오후가 되기에는 충분했다.
시원한 커피를 마시면서 오후 일과를 시작했다. 얼음이 잘 녹지 않 텀블러에 인스턴트 디카페인 커피 스틱 두 개를 녹인 다음 찬물을 반쯤 채웠다. 아기 주먹만 한 얼음 두 개를 넣으면 완성이다. 커피를 다 마시고 다 녹지 않은 얼음에 찬물을 채웠다. 몇 모금 마시고 났더니, 목이 칼칼해졌다. 에어컨 바람도 유난히 차게 느껴졌다. 퇴근하고 나서도 여전히 목이 불편했다. 하루에 얼음물을 1.5리터 넘게 마신다. 목이 아픈 게 그 탓 같았다. 아홉 시가 되기도 전에 잠에 들었다.
토요일 새벽 네 시에 눈이 떠졌다. 운동을 가려다 포기하고, 병원 가려고 마음먹었다. 아내는 수액을 맞고 오라고 했지만, 그 정도는 아니었다. 나는 <모순>을 들고 집을 나섰다. 잠시 병원에 다녀오려는 건데, 책을 왜 집어 들었는지는 모르겠다. 여덟 시가 조금 넘은 시간인데, 이비인후과에는 진료를 보려는 환자로 붐볐다. 다들 마스크를 끼고, 자신의 이름을 부르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내는 어떤 의사에게 접수했냐고 물었다. 나는 특별한 말을 하지 않아서, 대기 인원이 적은 곳으로 배정받았다. 역시나 아내가 원하는 데가 아니었다. 목이 살짝 불편한 건데, 거기서 거기겠지 하며, 걱정하지 마라고 했다. 오히려 다른 의사의 긴 대기 진료자 명이 더 빨리 줄고 있었다. 재수가 없다고 생각할 때쯤 의사가 내 이름을 불렀다. 의사는 귀에 온도기를 대고, 목을 살폈다. "약 먹고 푹 쉬면 나을 거예요."라는 말을 예상했는데, "목이 엄청나게 부었어요, 입원 며칠 하는 게 좋겠는데요. 코로나일지도 모르니 검사해 보실래요?"라는 말이 돌아왔다. 코로나가 유행이라고는 들었지만, 주변에 환자도 없었고, 딱히 돌아다닌 곳도 없었다. 머릿속이 복잡했다. 오랜만에 코로나 진단 키트로 목구멍을 쑨 다음에 진료실 앞에서 대기했다. 아내에게 전화했더니, 병원에서 돈 벌어먹으려고 다 그런다고 했다. 의사는 5분쯤 지나서 나를 불렀다. 마치 우리 얘기를 들어서, 자신을 무시하지 말라는 듯, 목소리에 힘을 주 "코로나네요."라고 말했다. 희한하게 의사가 코로나라고 불러 주고 나자 나는 완전한 코로나 환자가 된 듯했다. 내 몸은 더 오슬거리고, 다리 힘이 빠졌다.
환자복을 갈아입고, 6인실을 배정받았다. 간호사는 비타민과 항생제 수액을 손등에 놓았다. 수면제 성분이 들어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잠이 스르르 몰려왔다. 그렇게 두세 시간을 푹 잤다. 3년 전에 코로나에 처음 걸렸을 때보다는 고통이 훨씬 덜했다.
나는 <모순>을 읽었다. 초판이 1998년에 발행되었고, 이 책은 1999년에 발행된 99쇄였다. 1998년이면 내가 대학 4학년 때였다. 그러니까 주인공 안진진은 나보다 세 살 많은 누나다. 책을 읽으면서 그 시절로 돌아간 듯했다. 책의 분위기와 배경, 인물 묘사가 그러했다. 같은 시대 동년배인 안진진에 감정을 이해할 수 있었다. 일란성쌍둥이로 태어나 외모와 목소리, 성격, 졸업한 학교까지 비슷했던 엄마와 이모. 선으로 들어온 남자의 사진을 고르며 이 둘의 삶은 완전히 뒤바뀐다. 엄마는 가정에 소홀한 술주정뱅이 남편을 만나 좌대에서 양말을 팔며 가정을 챙긴다. 게다가 한참 뒤 남편은 중풍에 치매까지 걸려 돌아온다. 이모는 다른 사람들의 기준에서 매우 모범적이고 가정적인 남편을 만나 좋은 동네, 넓은 집에서 행복하게 살아간다. 그러던 이모가 안진진에게 편지 한 장을 남기고 우리들의 예상과 다른 선택을 한다. 나는 지금까지도 이모의 심리 상태를 이해할 수 없다. 이모부가 바람을 피서 두 집 살림했다던가, 주식으로 감당치 못할 빛이 생겼다는 사실을 이모 혼자 가슴으로 삼켰다면 모르겠지만 말이다. 내가 내린 결론은 오지랖 넓게 내 기준으로 남의 삶을 평가하거나, 위로하지 말자는 거였다. 모든 게 행복해 보여도 불행이 숨어 있고, 모든 게 불행할 것 같아도 행복한 게 인생이다. 그 후 안진진은 전혀 다른 조건의 결혼 상대자 두 명을 두고 갈등한다. 아버지를 닮은 김장우와 이모부를 닮은 나영규다. 나도 그를 선택했는데, 이유는 나와 비슷한 면이 많은 남자이기 때문이다. 그녀의 결정을 가타부타하는 것도 오지랖이다. 우리는 안진진이 고민 끝에 한 결정을 존중해 주고, 그녀의 인생에 축복이 가득해지 바라 주면 되는 것이다.
코로나에 걸려 나흘 동안 입원했다. 내 코로나바이러스는 금요일 오전까지 잠복을 끝내고, 그 정체를 드러내려던 참이었나 보다. 어쩌면 그래서 내 발걸음이 별관으로 갔는지도 모르겠다. 내 대학 시절 나왔던 책은 26년 만에 사람들이 많이 읽는 책이 되었다. 안진진 누나는 어떻게 살고 있을지 궁금하다. 이모의 삶일까! 엄마의 삶일까! 코로나에 걸려 몸은 아프지만, 정신적으로는 가장 평화롭다. 회사와 가정의 굴레로부터 완벽하게 벗어날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이다. 코로나에 걸리는 건 싫지만, 이 시간은 좋은 것. 이것도 삶의 모순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