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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깊은 바다 Aug 10. 2024

딸아! 미안해

공연장 앞은 사람들로 붐다. 검은색 바탕에 동그란 하얀 점이 박혀 있는 원피스를 입고, 상앗빛 체크무늬 머리띠를 한 딸이 보였다. 나를 보더니 "아빠"하고, 손을 흔들며 달려왔다. 그러고는 내 손을 쥐었다. 아이 손에서 온기는 느껴지지 않았다. 아내와 아들은 보이지 않았다. 딸과 함께 공연장 근처에 있는 고가 도로를 걸었다. 나는 왜 이곳에 서 있고, 우리는 어디를 향해 가고 있을까! 그곳에는 차도 사람도 없었다. 단둘뿐이었다. 고가 도로를 조금 걷자, 난간 너머로 파란 바다가 보였다. 붉게 칠해진 벽, 넓은 바다, 잿빛 하늘! 어디선가 본 듯했다. 미국 영화에서 본 덴지,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에서 읽었던 덴지 기억이 흐릿했다.


이건 꿈일 수밖에 없었다. 지금 같이 걷고 있는 딸은 10년 전, 그러니까 다섯 살 때, 영화관에서 아들과 함께 사진을 찍었던 모습, 그대로였기 때문이다. 우리는 통행하지 못하도록 막아 놓은 차단봉을 피해서 조금 더 높은 곳을 향했다. 딸은 아직 웃고 있었다. 순간, 돌풍이 불었다. "악!"소리조차 낼 수 없을 만큼 짧은 찰나였다. 나는 딸의 손을 놓치고 말았다. 딸은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아빠!" 그러더니 바람에 밀려, 테니스공처럼 네 번쯤 통통 튀더니, 난간 밑으로 떨어졌다. 스카이다이빙하는 것처럼 빙글빙글 돌며 점점 작은 점으로 변해갔다. 아이를 지켜보는 것 이외에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딸을 다시 볼 수는 없겠다 싶었다. 슬프기보다는 황망했다. 다행인 건 잠에서 깨어나면 그만일 거라는 희망이었다. 다리 아래를 바라봤다. 부둣가 창고 위에서 한 노인이 나를 보며, 손을 흔들었다. 그는 소리쳤다. "여기 딸이 있으니 데려가세요." 노인의 무릎에 앉아 손을 흔드는 아이가 보였다. 아주 먼 거리였지만, 얼굴은 또렷했다. 딸이다.  


눈을 떴다. 역시나 꿈이었다. 딸은 큰방 침대에 누워 곤하게 자고 있었다. 나는 바로 일어나지 못하고 5분쯤 천장을 멍하니 바라봤다. 냉장고에서 꺼낸 찬물을 마시고 나서야 정신이 좀 들었다. 꿈꾸는 데는 대개 이유가 있다. 그게 슬프거나, 기쁘거나 마찬가지다. 며칠 전에 있었던 그 일이 내게 주는 경고이자 신호 같았다.


사흘 전, 나는 퇴원했다. 코로나에 걸린 지 4일째 되는 날이었다. 다음 날 나가려고 했지만, 아들이 확정 판정을 받았다. 입원실이 부족해 내가 쓰던 병실을 아들에게 주면 어떻겠냐고 아내가 제안했다. 아내는 병원에 데리러 가고 싶지만, 몸 상태가 좋지 않다며, 버스를 타고 집에 와 달라고 했다. 다행히 병원 앞 고가 도로만 건너면 버스 정류장이다. 버스는 5분쯤 지나서 도착했다. 마스크를 쓰고 한적한 뒷자리에 앉았다. 다섯 정거장만 가면 집이다. 목이 간질간질하다. 참으려고 했지만, 그럴수록 기침은 더 나오려고 했다. 잔기침하는 데도 눈치가 보였다. 정거장에서 내려 집까지 걸었다. 어두운 밤의 공기도 낮의 더위를 다 식히지 못해 후덥지근했다. 약기운 때문인지, 코로나 후유증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어질어질했다.


아파트 현관문의 비밀번호를 눌렀다. 비밀번호 오류 알림이 울렸다. 순간, 아내의 말이 떠 올랐다. 내가 입원해 있을 때 딸이 방학을 맞아 친구들과 파자마 파티를 한다며 일방적 통보만 하고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고 했다. 아내는 이번에 딸의 버르장머리를 고친다며, 비밀번호를 바꾸겠다고 했다. 그러면서 딸을 남처럼 방관하지 말고, 호되게 혼내라고 했다.


초인종을 눌렀다. 아내가 문을 열었다. 아내는 눈을 흘기며, 나를 바라봤다. 딸 때문에 짜증이 나서 못 살겠다고 했다. 내가 없는 사이에 버릇없는 행동을 엄청나게 해댔다고 했다. 병원에서 오자마자 괜찮냐는 말 대신 그런 말부터 들으니, 짜증이 났다. 신발을 벗고 거실에 들어섰다. 딸 방 앞 거실에 선풍기가 드러누워 있었다. 딸이 넘어트린 게 분명했다. 참던 화가 솟구쳤다. 나는 딸의 방을 향해 빠르게 걸었다. 딸은 자기 방 침대에 누워 스마트폰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어쩌면 닥칠 일을 예상했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딸을 향해 "정신 안 차릴래"라고 고함을 질렀다. 아이는 깜짝 놀라 울었다. 감정이 격해지자 이성을 추스를 수 없었다. 폭력은 어떠한 이유로라도 정당화할 수 없다. 그러나 그러지 못했다. 내 손에 잡힌 건 베개였다. 가장 안 아플 걸 골랐다고 하지만, 손에는 힘이 가득 들어갔다. 그러고는 아이를 향해 네 번쯤 휘둘렀다. 아이는 처음 있는 일에 당황했는지 침대에 고개를 푹 숙이고 통곡했다. 폭력은 폭력을 낳는다고 했던가! 목소리는 커졌고, 감정은 좀체 사그라지지 않았다. 아이는 계속 울고 있었고, 나는 소파에 앉았다. 거기서 멈춰야 했다. 나는 이성을 찾지 못했다. 핑계라면 아직도 누워있는 선풍기 때문이었다. 나는 아이의 아이폰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바닥을 향해 힘껏 던졌다. 엄마에게 버릇없이 굴면 스마트폰도 쓸 자격이 없다는 게 이유였다. 내가 그럴 용기를 낼 수 있었던 건 이미 액정이 반쯤 나가서였을지도 모르겠다. 스마트폰이 내 손을 떠나면서 바로 후회했지만 말이다. 아내는 딸을 좀 잡으라더니, 이제는 그만하라며 나를 말리고 있었다. 시간이 조금 흐르자 내 흥분은 잦아들었고, 아이 울음소리도 그쳤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머릿속은 후회로 가득 찼고, 가슴은 먹먹했다.


다음 날, 회사에 출근해서도 딸의 얼굴이 아른거렸다. 딸은 공부하는 걸 좋아하지 않지만, 심성도 곱고, 예쁘기도 하다. 공부를 좋아하지 않는 게 나쁜 일이거나 혼날 일은 아니다. 엄마에게 어떤 버릇없는 행동을 했는지 묻지도 않고, 대화해 보려는 노력도 없이, 소리부터 지르고 폭력까지 쓴 내가 부끄러웠다. 딸을 볼 면목이 없었다. 먼저 사과하는 게 당연했다. 나는 퇴근하고 곧장 집으로 갔다.


아이는 풀이 죽어있었지만, 다행히 내 눈을 피하지는 않았다. 나는 식탁으로 딸을 불렀다. 먼저 너무 심하게 혼내서 미안하다고 했다. 그러면서 공부 안 하는 건 뭐라고 안 하겠지만, 엄마에게 버릇없게 행동하면 용서할 수 없다고 했다. 딸은 "예"라고 말한 뒤 고개를 숙였다. 딸도 자신의 행동을 반성하는 게 눈에 선하게 보였다. 그래서 더 미안했다. 아내에게 "스마트폰까지 던진 건 너무 심했지?"라고 물으니, 잘했단다. 예전에 쓰던 삼성 스마트폰이 있으니 그걸 쓰면 된다고 했다. 이번에 박살 난 스마트폰은 아내가 딸의 스마트폰 쓰는 시간을 통제할 수 없는 반면에 그전 기종은 그게 가능해서 오히려 잘 됐단다. 그러면서 소파나 이불 같은 데 던지지 그랬냐며 웃는다.  


딸은 요즘 예전에 자기가 쓰던 액정이 반쯤 깨진 삼성 스마트폰으로 인스타나 유튜브를 본다. 2학기 시험이 끝날 때까지 전화기 없이 살겠다고 했다. 공부하겠다는 의지가 아니라 삼성 스마트폰을 쓰면 아이들에게 놀림을 받기 때문이란다. 참 알 수 없는 아이들의 세상이다. 딸은 그날 이후로 순한 양처럼 변했다. 말투도 눈빛도 그렇다.


딸은 큰방에 누워 있는 내 옆으로 다가왔다. "아빠, 70점 맞으면 아이폰 사주실 수 있어요?"라고 묻는다. 별로 고민하지 않고 그러겠다고 했다. 인스타에 도둑맞은 집중력을 되찾기 전까지 받기 어려운 점수라는 걸 알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아빠, 80점 맞으면 에어팟도 사주실 수 있어요?"라고 물었다. 이거 요즘 많이 나오는 마라탕, 탕후루랑 비슷한 건가! 나는 웃으며, "에어팟이 아니라 아파트를 사줄게"라고 답했다. 딸은 "와! 정말이에요. 약속했어요?"라며 환하게 웃었다. 딸이 정말 노력해서 원하는 점수를 얻는다면, 기분 좋게 사줄 수도 있을 것 같다. 지금 딸에게 필요한 건 자신이 무언가를 이룰 수 있다는 자신감이기 때문이다.


내가 꾸었던 꿈 이야기 딸과 아내에게 했다. 아내는 깔깔거렸다. 딸은 스마트폰으로 해몽을 검색했다. 자녀가 바다에 빠지는 꿈은 키가 크고, 학업 성적이 올라갈 징조라고 했다. 딸은 내 꿈에서 새 아이폰을 가질 수 있다는 희망을 얻었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그 꿈을 곰곰이 떠올려 보았다. 딸이 아주 위험한 곳으로 빠지는 것 같지만, 결국은 잘 살 수 있으니, 마음 편하게 먹으라는 위안 같았다. 요즘 들어 아이에게 책을 보라는 이야기를 자주 한다. 내년이면 삼학 년이 되고, 고등학교에도 진학해야 하니 더 걱정된다. 다행히, 나를 너무 닮은 딸이라서 위안이 된다. 그 시절 딸과 같이 공부를 좋아하지 않았고 비슷한 성적을 받았던 나였지만, 행복하게 살 수 있다는 걸 직접 증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는 바람 때문에 딸의 손을 놓칠 수 없다. 딸아! 미안해. 내가 네 손을 놓쳐서. 그게 비록 꿈일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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