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과 만나면 나는 우주가 된다. 좀 더 적확하게 표현하자면 우주라 불린다. 그 이유는 무한한 공간인 그곳과는 달리 거창하지 않다. 그들과의 모임은 올해 1월 만들어졌다. 평생교육원에서 글쓰기를 배운 게 인연이 됐다. 누군가 독서 토론을 해 보면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글쓰기 수업은 인터넷 줌으로 이뤄지니 한 달에 한 번쯤 만나서 좋은 책을 읽고 이야기를 나누면 좋을 것 같았다. 나는 흔쾌히 그러자고 했다. 거기에는 네 명이 참여했다. 내가 왜 선택됐는지는 궁금했지만, 이유는 묻지 않았다. 분명한 건 그들과 만나면 재미있다는 사실이다.
우리 모임에는 황 씨가 두 명이다. 처음에는 둘 다 ‘황 선생님’이라 불렸다. 카톡으로 이야기를 나누다가 누구를 부르는지 헷갈리기 전까지. 둘을 구분할 수 있는 호칭이 필요했다. 나는 본관인 우주 황 씨를 주제로 글을 쓴 적이 있다. 별 이야기도 글의 소재로 자주 등장한다. 한 선생님이 그게 뇌리에 남았나 보다. 그러면서 내가 ‘우주 선생님’, 다른 분이 ‘황 선생님’이 되었다. 처음에는 그렇게 불리는 게 어색했다. 이제는 예전만큼 낯설지 않다. 가끔은 필명을 우주로 바꿔볼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8월에는 모두 모이기로 했다. 세 명은 목포, 한 명은 광양에 산다. 광양에 사는 이 선생님은 계절이 바뀔 때만 직접 만났다. 이번 달 발제는 내 차례다. 룰루밀러의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를 골랐다. 두 번 읽었지만, 좋은 분들과 다시 읽고 싶었다. 데이비드 스타 조던의 가치였던 ‘질서’와 ‘분류’가 얼마나 불완전하고 위험할 수 있는지를 보면서, 요즘 더 자주 연상되는 인물과 사건이 있었기 때문이다.
만나는 장소로 보성을 정했다. 목포와 광양을 선으로 그었을 때 중간에 가장 가깝다는 게 이유다. 오후 두 시쯤 춘운서옥에 들어섰다. '고풍스럽다.'라는 형용사를 설명하려고 만든 카페 같았다. 150년 된 한옥을 수리해서 만든 집이라는데, 정원에 심어진 300년 된 녹차 나무, 여러 돌, 아기자기한 건물들과 조화롭고 자연스럽게 어우러져 보는 내내 감탄했다.
나는 주문한 차를 기다리며 나무 마루에 앉았다. 몇 백 년은 됐을 법한 나무로 만들어진 마루를 손으로 만졌는데, 촉감이 어찌나 부드럽고, 시원한지, 잠시 드러누워 눈을 붙이고 싶었다.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파랬다. 입구에 능소화 줄기는 소나무를 칭칭 감아 싸고 꼭대기까지 올라가 주황색 꽃을 주렁주렁 달고 있었다. 머릿속을 스쳐 가는 게 있었다. '소화!' <<태백산맥>>에서 정하섭을 사랑했던, 무당의 딸이었다. 기와집 정원 한 편에 화사하게 핀 능소화를 보며 그들의 이루어지지 못한 애틋한 사랑을 떠올릴 무렵, 차를 받아 가라는 알람이 울렸다.
우리는 함께 차를 마시며 살아가는 이야기부터 나눴다. 이 선생님은 자신의 시가 담긴 시집을 한 권씩 선물했다. 집에서 읽던 책도 나누었는데, 나는 행동이 굼뜨고, 책도 가져오지 않아서 마지막 덩그러니 남은 두 권을 집어 들었다. 본격적으로 책 이야기를 나누었다. 세 분은 글쓰기 실력만큼이나 말솜씨도 좋아서 논리 정연하게 읽은 소감을 말했다. 처음엔 읽기 어려웠지만, 뒤로 갈수록 재미있고, 다 읽고 나서는 어려운 함수 문제를 푼 건처럼 후련하면서 기분이 좋다고 했다. 데이비드 스타 조던의 생애를 보면서 떠오르는 사람을 말해 보자고 했을 때, 너무 빠르게 공통적인 한 사람을 지목해서 놀라기도 했다. 나는 이 책을 읽고 본질적인 가치가 아니라 허상으로 가득 찬 우상을 쫓는 걸 경계해야 한다는 교훈을 얻었다. 단편적으로 생각하고, 보고 싶은 것만 보면, 자신까지도 그 함정에 빠질 위험이 커지기 때문이다.
저녁은 황 선생님이 보성 율포 해수욕장 근처에 있는 갯마을 횟집에 가자고 했다. 나는 썩 내키지 않았다. 보성 하면 꼬막 정식 아닌가! 관광지 근처라서 흔하디흔한 식당일 거라는 고정관념도 있었다. 게다가 거리도 꽤 멀었다. 목포는 더 가까워지지만, 광양은 그렇지 않았다. 다행히 이 선생님도 그곳에 가보고 싶다고 했다. 나도 회를 좋아하고, 이 선생님까지 괜찮다고 하니, 반대할 명분도 없었다.
횟집은 점심 쉬는 시간을 보내고 네시 30분에 문을 연다고 했다. 우리는 시간에 맞춰 가게 앞으로 갔다. 식당에는 우리보다 먼저 대기하는 손님들도 있었다. 게다가 지역 주민도 여럿 보였다. 이쯤 되면, 기대를 품을 만했다. 예전 회사 동료가 대관령 양 떼 목장에 가서 양에 풀을 주고 먹은 양꼬치가 가장 맛있었다고 농담을 한 게 떠올랐다.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책을 읽고, 물고기를 먹는 게 동료가 말한 그런 상황과 비슷해서 웃음이 나고 기대는 더 커졌다.
우리가 주문한 막회는 우럭을 푸짐하게 막 썰어서 고소한 양념에 버무려진 상추, 고소한 김 가루와 함께 보기에도 좋게 차려졌다. 김에 상추를 넣고, 초장과 고추냉이를 묻힌 회 서너 점을 입에 넣었다. 입안에서 도는 고소하고 담백한 식감에 빠져 황홀하기까지 했다. 황 선생님 말을 듣지 않고 꼬막 집에 갔으면, 이 맛있는 걸 평생 먹어 보지도 못할 뻔했다. 고정관념에 빠지지 마라는 것도 책에서 얻은 교훈인데, 그게 체득되기까지는 한참이 걸리나 보다.
나는 우리 모임의 리더이자, 아주 착하고 똑똑해서 곧 교장선생님이 되실 엘 선생님에게 장흥 천문대에 가보자고 제안했다. 엘 선생님은 한순간도 망설이지 않고 그러자고 했다. 하늘에 구름 한 점이 없었고, 시간도 적당해서, 천문대에 가기 딱 좋은 날이었다. 장흥 천문대라면, 아이들이 어렸을 때, 그러니까 10년 전쯤 함께 가 본 기억이 있다. 가끔 별을 보고 싶을 때 다시 가 보려고 했지만, 쉽게 실행에 옮기지는 못했다. 오늘은 다시 그날이 되었다.
보성을 출발할 때 석양이 서쪽으로 내리기 시작하더니, 장흥에 도착할 때쯤에는 어둠이 온 세상을 집어삼켰다. 억불산 정상 부근에 있는 천문과학관까지는 임도를 따라 2.4km 올라 가야 한다. 길도 비좁고, 캄캄해서 반대편에서 차가 올까 조마조마했다. 회원들은 다들 중년이지만, 아이들처럼 설레는 게 말투에서 느껴졌다. 정상에 도착해서 차 문을 열었을 때 풀벌레 소리가 사방에서 들렸다. 산 정상의 밤공기는 가을이 이미 깊숙히 자리잡았음을 알 수 있게 해 주었다.
우리는 천문대에서 유치원생이나 좋아할 만한 3디(d) 영화를 보고, 천체 투영관에 같이 누워 캐나다 오로라 영상을 감상했다. 마지막은 기대하던 별자리 해설 프로그램이었다. 해설 선생님은 레이저 포인트로 북극성과 북두칠성 등을 설명해 주었다. 나는 꽤 오랜만에 은하수도 보았다. 우리는 환경 파괴 때문에 많은 별들을 볼 수 있는 기회를 놓치고 있고, 은하수도 운이 좋아야 볼 수 있다. 천체 망원경으로는 고리가 또렷한 토성, 우주를 가득 채운 별을 보며 내가 얼마나 미약한 존재인지 볼 수 있었다. 우리는 40여 년을 넘게 살면서 알지 못하다가 글을 쓰면서 만나, 같은 시공간에서 함께 우주를 바라보는 사이가 되었으니, 보통 인연은 아닌 것 같다.
나는 별을 볼 때마다 추억을 떠올리곤 한다. 어렸을 적 반딧불이과 함께 많은 별들이 하늘을 수놓던 시골 마을, 청년 시절 선원으로 태평양을 항해할 때 외로움을 달래주던 별똥별과 은하수. 그리고 중년이 되어 억불산에서 글벗들과 함께 본 우주. 그날 나는 집에 돌아와 꽤 깊은 잠에 빠졌다. 우리의 이번 모임은 '우주와 함께한 보성 여행'으로 기억하고 싶다.